진정한 강자 上

in #kr6 years ago (edited)

[근 십 년 텀을 두고 두 명의 젊은 사업가 지인을 관찰하며 이에 대해 느낀 바를 적은 글입니다.]

사실 굳이 그 사람 이야기를 내가 꺼낼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스스로를 초일류랑 비교하며 그래도 뭔가 보조라도 맞춰가는 인생인냥 포장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일류는 고사하고, 철 없던 시절 은연 중 무시하던 사람에게도 잔뜩 밀려 있는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몇 가지 코멘트를 남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나와 친했던 인물도 아니다. 오히려 나에 대해 무관심했거나 또는 경멸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에 대해 쓰는 것은, 내가 직접 경험한 인물 중 그가 가장 우수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몇 가지 행동에서 나는 위압감을 느꼈다. 어떤 점에서, 자신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의 뇌리에 남아 본인에 대한 글을 몇 가지 끄적이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그를 영웅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 군대 후임이었다. 내가 복무했던 미 8군의 핵심 조직에는 큰 과장 없이 이 나라를 이끌어갈 엘리트들이 득실거렸다. 그는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인간으로 평가되었다. 실상 그가 대부분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참 흥미로운 일이다.

내가 처음 그를 눈 여겨 보았던 것은 아마 축구 시합 때였을 것이다. 그는 서울대에서 탑클래스에 해당하는 과를 졸업한 미남이었지만 여하간 당시 그는 이등병이었다. 두 시간이 넘는 축구 시합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골키퍼였다.

우리 소대는 축구를 그닥 잘하지 않았다. 다들 열심히 뛰었지만 스코어는 한 점 차로 뒤지고 있었다. 5분인가 남겨두었을까, 내내 골키퍼만 보던 그에게 필드를 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그 5분 만에 두 골을 넣었고, 우리는 역전승을 거두었다. 나는 당시 그의 표정을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는 나를 봐라는 식으로 이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축하하는 선임들의 격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보였다. '여긴 군대일 뿐이니까. 난 원래 너희들이랑 어울릴 레벨이 아니야.' 그의 얼굴에서 이런 메세지를 읽었다면 지나친 비약이었을까.

나처럼 또래 집단에서, 그닥 돋보이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종종 사람들의 관심과 환호 속에 자신을 화려하게 드러내는 그런 상상을 한다. 마치 할리웃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미식 축구부 주장처럼 말이다. 이목을 끌고 싶어 학업을 포기하며 노래나 운동에 많은 시간 투자를 하는 친구들도 많다.

그 녀석에게 그 순간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그는 그 날 이후 다시는 우리와 함께 축구를 하지 않았다. 몇달간의 짧은 기간 적응을 거치고 그는 이내 자기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카투사라지만 군대는 힘들다. 매일 여섯시면 점호를 나가야 했다. 그는 단 하루도 예외 없이 늘 일정하게 한 시간을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자기 비즈니스 플랜을 세웠다. 그는 입대 전 운영하던 사업체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도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가 언론에도 오르내리던 S대의 졸업 파티를 기획했고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인터넷에 수 많은 기사가 뜬다는 걸 알게된 것은 그 후로 한참 뒤의 일이다.

나는 지금도 종종 그의 이름을 검색한다. 보통 사람들은 취직의 대상인 그 수많은 대기업들을 고객으로 두고 있는 그의 비즈니스는 거침 없이 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는 젊은 시절의 성공이 독이 된다고 말하는데 과연 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일지 궁금하다. 내 짧은 지식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미래를 막연히 동경하거나 또는 언젠가는 거꾸러질 것이라고 폄하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만, 내가 아는한 세상에는 성공이라는게 너무나 당연한 인생도 존재한다.

젊은 시절 탐닉하며 읽던 만화책에 나온 한 구절....... 바로 세상에는 출생이나 신분과 관계 없이 세상에 자기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황금 열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 그 녀석일려나.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내게 일퍼센트의 관심도 없었다. 어느 시점 선임으로서가 아니라 인생 후배로서 널 대단하게 생각하노라고 먼저 말한 뒤 조언을 구한 적이 있는데 그는 몇 일 뒤 내가 한 말을 전부 까먹더라. 하긴 고작 여자 친구를 사귄 일이나 노력만 하면 평범한 사람도 갈 수 있는 대학을 입학한 걸 마치 대단한 성취인냥 자축하고 그 나름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보잘 것 없는 성공의 기준을 만들고 그것만 이루면 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어오던 순진하고 멍청한 내가, 어린 시절부터 너무도 당연한 칭찬이 지겨워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만들고 남에게 그걸 믿게 만들었던 그에게 어떻게 보였을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동네 뒷산을 오르고 느끼는 만족감도 분명 그 나름의 의미는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에베레스트를 등반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인생에 우열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시민이 삶 전반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자기 나름의 만족이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백치의 삶이 제일이겠지. 하지만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결국 현실의 무게에 눌려 자신은 가보지 못한 산을 바라보기 마련이다.

그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때 그가 내게 했던 조언은 세상에는 너무도 똑똑한 인물이 많고 당신은 그 수준이 못되는 것 같으니 고시 같은 건 준비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정작 본인은 시시해서 안 한다는 말도 했었지. 그래도 내가 선임이었기 때문에 좀 돌려서 말했다만 그 메세지는 오독의 소지 없이 명확했다.

실제로 그의 말은 맞았다. 내가 눈물 콧물 빼가며 죽도록 공부하고도, 전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합격률이 반이 넘는 지금 이 시험은 내게 여전히 버거우니까. 누군가는 일등을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누군가는 이십년을 공부해도 되지 않는 시험을 1~2년 준비로 후딱 해치우는 게 너무도 당연한, 똑같이 인간 뱃속에서 자라고 태어나도 이렇게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이다.

나는 내 젊은 시절을 시시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싸그리 쓸 수 밖에 없었다. 애당초 그런 문제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인간이 온전히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데에 그 역량을 쏟은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평범함의 굴레 속에 남의 인생에 일어나는 '보통의 불행한 일'은 예외 없이 내게도 찾아온다는 것을 보아온 내가 차후 어떤 일에 도전할 용기는 없다.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나는 시답잖은 과제 앞에서도 전기충격기를 맞은 인간마냥 혼이 나가 있는데, 무슨 이유로 내가 야심 같은 걸 가져야 한다는 말이냐. 나는 이 시험만 붙으면 극단적인 안정지향으로 살겠다고 공언한 바 있는데, 그건 그저 일순간의 괴로움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기사들의 무용담을 이야기하고 한 끼 식사와 숙소를 대접 받는 허름한 음유 시인 정도로 인식하는 나는, 내 글이 썩 훌륭하지 않다는 것과 별도로 뭔가를 쓰는 행위에 있어서 조금의 객기는 부려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종종 장수와 부귀영화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 적이 있으나 사실 지금 죽어도 크게 상관은 없다. 내 작은 그릇은 몇 가지를 이룬 것으로 이미 충분히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내게도 있었던 '좋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서이지 가보지 않은 영역을 탐험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가끔은 내가 사는 꼴이 눈물나게 한심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통째로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니 오히려 반대이려나.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끝내 살아버리게 된다면 하루를 근근히 영위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희극적인 경멸과 안쓰러움을 품고 가야만 할 것이다. 무언가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있길 바란다만.

결국 동네 뒷산을 오르기 위해 비싼 등산복을 사고 정상의 나무 벤치에서 김밥을 먹고 뿌듯해하는 인간은 선한 부류의 사람일지는 모르나 멋있는 사람은 아니다. 멋진 인생은 저 놈 같은 녀석들이 알아서 살고 있을게다.

  • 2012년 5월에 쓰다.

※ 거진 1년 전에 쓴 글을 재업로드한 것입니다. 종전 포스팅에 보팅해주신 분들은 여기 말고 다른 분들 포스팅에 보팅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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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환경에서나 포식자는 항상 있는 것 같습니다 ㅠㅠ 아무리 악기 연습을 한다 한들 태어날 때 부터 음악적 재능 + 음악 관련 환경에서 자라신 분들을 이길 수 없는 것 처럼요...

어떤 부분에서는 분명 "나"도 포식자 일 테니깐 스스로 위로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ㅋㅋㅋ

너무 잼있게 읽고 100% 공감하고 갑니다~ :)

ㅎㅎㅎㅎ 투자를 진행하시는 roostermine님의 전략이야 말로 누군가에게는 가장 날카로운 포식자의 이빨일 수 있겠죠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진정한 강자 중편 또는 하편이 기대되네요.

중편은 없고 하편만 있습니다 ㅋㅋㅋㅋ

그 후임은 엄친아인가보군요...

네 뭐 엄친아에 더 없이 부합하는 인물이었습니다 ㅋㅋㅋ

글 내용에 공감 합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오래전...

살면서 저런 사람을 보는 것도 사실 행운이죠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거기는 작길.. ㅋㅋ
상실의 시대에서 그 선배 유형인가봐요

근데 상실의 시대 그 선배는 거기도 크지 않나요 ㅋㅋㅋㅋ

다시 읽어보았지만 여전히 재미있습니다~ 처음 읽을 때와는 또 느낌이 다르네요 ㅋ

두번이나 보팅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헤헤

재미있는 글은 여러 번 읽어도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처럼요~ ㅋ

판관님은 또 누군가가 볼 때는
참 멋진 사람일 겁니다.

그랬다면 좋겠군요 ㅠㅠ

한 날 한 시에 나온 손가락도 길고 짧다는데
세상 사람이 다 똑같으면 너무 밋밋하지 않을까요
지평선도 충분히 가치가 있지만
가끔은 노을이 딛고 가는 굴곡진 능선이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편안한 휴일 지내세요.

댓글에서도 작품이 나오네요 ㅋㅋㅋ
사실 일일히 전부 긁을 수가 없어서 언젠가 쓰신 걸 책으로 내주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즐거운 휴일 되셨기를 바랍니다 ^^

다름을 인정하는 것과도 다르고..
그냥 세상이 혹은 사는게 그렇다고 얘기하기도 그렇고...
뭔가 씁쓸하네요. 저는...

저 글을 처음 썼을 때 그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면 아마 씁쓸함이 맞을 겁니다...

사람얘기가 제일 재미있죠

결국 다 사람 이야기죠 ㅎㅎ 얼마나 그걸 잘 표현하고 받아들이느냐가 전부일듯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