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상

in #stimcity2 years ago (edited)

1 일요일까지 한 주간 집 정리에 매진하기로 했다. 정리 끝내고 개운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책상 밑 책장 아래 깔린 카페트 빼기에 실패해(뭐가 복잡하다) 청소가 멈췄다. 오늘 집을 치우는 동안 몇 통의 연락을 주고받았고, 그 생각에 괜히 답답해져서 버릴 생각으로 걷어낸 카페트를 대강 뭉쳐논 채로 정리가 덜 된 책상에서 노트북을 열었다.

2 월요일부터 미친 듯이 집을 정리했다. 들어올 때 가지고 온 짐으로만 생활하는 것을 최대한의 목표로 했다. 창고에 쌓아놓은 짐을 전부 꺼내 거의 남기지 않고 버렸다. 월요일부터 적어도 하루에 다섯 번 이상은 쓰레기 버리러 왔다 갔다 했다. 이 글을 쓰고도 다녀와야 한다.

3 온갖 것을 다 버렸다. 악보도 오백 장 넘게 버렸다. 심지어 악보 뽑을 생각으로 샀던 프린터도 버렸다. 무대 의상도, 언젠가 쓰겠지라며 남겨둔 웬만한 물건도 다 갖다 버렸다. 조미료, 그릇을 다 갖다 버려 지금 싱크대는 갓 이사 온 집처럼 휑하다. 이걸 원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깨끗한 환경에서 지내고 싶다.

4 노동하는 요즘, 정리가 덜 된 집에서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운동뿐이라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한다. 유일하게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에 자꾸 시간이 늘고 강도가 높아진다. 노동과 운동이 합쳐져 몸은 난생처음 겪는 근육통으로 괴로워한다.


5 관계가 끝나고서야 그토록 듣고 싶던 말을 듣게 되는 것이 잔인하다. 그 한마디를 듣고 싶어 막막해하던 마음. 관계가 끝나고 나서야 상대가 원하는 것이 바로 보이는 일도 잔인하다. 그걸 해주는 일이 이제는 내게 아무렇지 않아진 것도 슬프다. 무엇보다 슬픈 건 이제 와서는 그때 알았더라면 이라는 후회조차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6 내일은 H를 만나기로 했다. H는 어제 일을 그만뒀다. 고작 1년이지만 유튜브를 그만둔 후로 서로에게 정말 긴 시간이었다 싶다. 조촐하지만 퇴직 축하 파티를 계획하고 있어 고깔모자도 사뒀다. 약속 장소 근처에 맛있는 디저트 가게가 있어 거기서 케잌을 살 생각이다. 그리고 편지를 써갈 예정이다.

7 2년 전만 해도 만나는 모든 이에게 뭔가를 주거나 하다못해 짧은 편지라도 써주려 노력했다. 왜였을까? 그냥 그게 좋았다. 그 사람을 생각하며 편지지를 고르고, 좋아하는 펜으로 얼굴을 보고는 하기 힘든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 좋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편지를 주는 일이 마음에 짐을 주는 것으로 느껴졌다. 쓸모도 없고, 그냥 말일 뿐인데.

8 편지 쓸 생각을 하게 된 건 H의 첫 출근 날 편지를 써준 기억 때문이다. 쪽지에 가까운 짧은 내용이었지만, 눈이 잔뜩 쌓인 이른 아침 출근할 H를 생각하니, 앞으로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왠지 애틋해져 글을 썼다. H도 기억하고 있을까? 그의 취직과 퇴직을 지켜볼 수 있어서, 그것을 옆에서 축하해줄 수 있어서 기쁘다.


9 현실로 돌아왔다-고 말하면 거창하지만 그래도 그런 기분이 든다. 반년 넘게 비활성화해둔 인스타그램 계정에 로그인해 피드를 종종 확인한다. 늘 그렇듯 동료들의 공연 소식, 발매 소식, 연주 영상 같은 것으로 가득하다. 나는 아주 멀리, 길게 떠나있었던 것 같은데 이들은 내가 떠났다는 사실조차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한편으론 그래서 대뜸 연락해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받아줄 것 같다. 다행인 건가.

10 나를 도와줄 수 있는(연주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지난 앨범을 함께했던 친구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얼마 전만 해도 다음 앨범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새롭고 대단한 것을 만들 걸로 상상했는데, 다시 익숙한 이름을 떠올리며 익숙한 그들의 연주 스타일을 떠올리는 내 모습이 낯설다.

11 갖다 버린 온갖 것- 은 지난 나의 역사기도 했다. 그것을 죄다 갖다 버리면서 나는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뭇거리곤 했다. 그래도 버렸다. 후회한다 하더라도 가기로 한 곳이 있고, 그 과정에서 그게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얼른 다 갖다 버리고 다시 달리고 싶다. 그것이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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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는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것들 -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