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저편

in EverSteem22 days ago



이상한 여행이다. 몇 번이고 되뇌었다. 본래 여행이란 게 계획대로 안 되는 게 자연스러우나 정도가 지나쳤다. 이번 제주도 여행은 큰 틀에서 근본적으로 희한하고 요상해서 이 전 여행들과 완전히 구분되었다. 아직 개념이 정립되기 전엔 마음속 파편이 날아다니며 혼란을 일으킨다. 잡히지 않는 이상한 기분을 모른 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날 선 신경을 달래고 견디면 불편이 추가된 기본값이 만들어진다. 기본값이 만들어지고 포기를 하면 어김없이 마지막날엔 선물처럼 그 느낌의 정체가 발견된다.

Astin과의 여행에선 좀처럼 글을 쓰기 어렵다. 베트남을 가든 호주를 가든 크로아티아를 가든 아무리 멀고 낯선 장소를 골라도 그와의 여행은 안정적이고 확정적이었다. 장소는 바뀌어도 우리는 유사하다. 약간의 변동성은 생기고 동선이 꼬일 때도 있다. 대체로 잘 자고 잘 먹고, 기분이 좋아지거나 들뜬다. 사진을 잔뜩 찍는다. 평온한 여행을 하고 자연에서 만족감을 얻거나 예술적인 장소에서 감동한다. 자연이 주는 선물을 만끽하고 행복을 가득 수집해서 돌아온다. 별 다른 걱정 없이 정서적 만족감을 얻고 몸은 피곤해도 휴식을 취한다.

Astin과의 여행은 일상의 연속이었다. 장소와 할 일이 새로워질 뿐 그 형태와 느낌은 어딘가 일관적이다. 우리가 만든 여행의 모습은 서로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포함된 상태로 잠정적 합의에 도달되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만족감을 준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 아무런 긴장도 걱정도 없었다. 어차피 한국 아닌가. 5박 6일의 제주 여행, 섬이라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게 있을까? 게다가 그와 함께 제주 온 일이 처음도 아닌데 말이다. 첫날 비행기 안에서 구름이 그리는 환상적인 하늘과 바다를 보았다. 때 마침 커다란 다리를 보며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그대로였고, 이전처럼 관성대로 여행을 하려고 했다. 제주도 날씨는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우리가 도착한 그 순간부터 5일 내내 비가 왔다. 부슬비도 아니고 장맛비처럼 비가 쏟아지듯 오고 바람에 흩날렸다. 하늘은 내내 어두운 구름에 가로막혀 해가 보이지 않았다. 멸망할 듯한 날씨. 제주에 도착한 후 파란 하늘을 본 순간이 다 합쳐서 1시간도 되지 않는다.

만약 제주 모든 지역에서 내내 비가 왔다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실내에서만 머물렀겠지. 그러나 마치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지역마다 날씨가 달랐다. 마치 두더지 숨바꼭질을 하듯이 우리가 서쪽에 있을 땐 동쪽 지역의 날씨가 더 좋았고, 동쪽으로 옮기자 먹구름도 같이 왔는지 비가 미친 듯이 내렸다. 첫날 숙소로 돌아와 밤에 김녕 해수욕장의 선명하고 동그란 무지개가 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서러워서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말하자면 이번 여행은 마치 나를 시험하는 것만 같았다. 인내심, 포용력, 내 그릇의 크기, 스트레스의 한계, 견딜 수 있는 한계선이 어디까지인지 여실히 보여준 여행이었다. 나의 민낯이 드러났다. 생각보다 나는 평온하지 않았고, 여전히 까탈스럽고 별로인 지점이 많았다. 참으로 인간적이고 취약한 사람이었다. 내 생각보다는 나를 더 보호해 주고 안전지대를 설정하고 너무 큰 스트레스를 주지 말아야겠다고 배웠다.

나는 아이처럼 기대했고 실망스러운 일엔 속상했다. 나의 기준에 충족하는 좋은 여행을 하고 싶었고, 좋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보내고 싶었다. 그것은 어떤 조급함이나 본전을 찾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순수한 기대감이다. 나는 여행을 통해 우주가 선사하는 선물을 발견하며 조금 더 행복해지고 싶은 기대가 있는 아이였다. 그건 아마 여행을 하는 한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날 우주는 잊지 않고 내게 말을 걸었다. 나의 요구대로 비가 오는 동쪽 지역을 떠나 서쪽 지역으로 갔다. 빗줄기가 점차 얇아지고 비가 완전히 그쳤다. 첫날 가보고 싶었던 '산양큰엉곶'을 갔다. 동화 같은 숲이었다. 사냥개와 토끼 비둘기가 있었다. 원숭이 인형이 점거한 카페와 하늘로 솟아있는 올라가면 무너진다는 기찻길이 있었다.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버려진 땅이었던 덕분에 큰엉곶은 다채로운 숲이 될 수 있었고 그 숲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로 인해 보기 좋게 길을 내어 아름다운 숲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식당에서 화장실을 가다가 우연히 흰 토끼 키링을 발견했다. 크기가 작고 품질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갔다. 흰 토끼의 머리에 걸린 고리를 떼어내어 제주 여행을 함께 했다. 토끼에게 '신월'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수많은 카페 중 단 번에 고른 'Holive' 로스터리에서 먹은 커피는 기대 이상으로 맛있고 분위기가 좋았다. 주민분들이 서로 만나 인사를 나눴다. 나가기 전 화장실을 가다가 호랑이 모빌에 시선이 멈추었다. 화장실에는 이런 시가 붙어 있었다.

괜찮을 거라고 우주가 속삭입니다

희망을 잃지 않으면 별일 없어요.
포기하지 않으면 별일 없어요.
관념을 내려놓으면 별일 없어요.
판단을 내려놓으면 별일 없어요.
별 개념 없이 앞으로 나가세요.
우주가 속삭입니다. 별일 없어요.
괜찮을 거예요.
All is well.



다 괜찮을 거예요. 마지막 손님이 되어 저녁을 먹은 수제 버거 집 화장실에는 이런 표어가 붙어 있었다.
'조화로운 삶의 지속'



노을을 보기 위해 헤매다 우연히 찾은 몬드리안을 닮은 카페에서 구름이 흐르는 걸 봤다. 구름의 경계가 하얀 설산을 만들었다. 노을은 구름에 잡아 먹혀 보이지 않았다. 통창이 보이는 의자에 여유로이 앉아서 책을 펼쳤다.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오늘이 마치 여행 첫날 같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깨달았다. 나는 여행자다. 딱히 여행의 경험이 많거나 특별한 여행을 한 건 아니다. 노하우 같은 건 조금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방랑자이고, 여행자이다. 우주는 여행이란 방식을 통해 나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결정적 기점 같은 선을 굳이 그려 넣는다면 그곳엔 언제나 여행이 있다. 저편의 세계로 도약해야 할 때 여행을 갔다. 크게 의식하거나 의도한 적이 없는데도 그랬다.

여행은 경계의 저편, 일상과 구분되는 바깥 세상으로 나를 데려가고 학습시킨다. 다음 과제가 이것이고, 내가 뛰어넘어야 할 한계가 여기라고 알려준다. 이제까지 여행이 휴식이고 선물이고, 안정적이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동안 여행을 가기 전 나는 지쳐있거나 소진되었고, 일상에서 새로운 동력을 스스로 낼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불균형의 상태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마다 여행을 했고 여행은 새로운 세계로 부드럽게 나를 초대하고 나를 회복시키고 나를 치유했던 것이다.

머리 아픈 문제에서 나를 해방시키고, 다른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주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달랐다. 내 삶은 모든 방면에서 조화롭고 만족스러웠으며 끊임없이 창조의 불이 솟아오르고 열의가 넘쳤다.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파괴가 선행되어야 한다. 조화로웠다면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파열이 필요하다. 새로운 갈등과 긴장이 생기고 불편한 무언가를 인식한 후에야 경계 밖을 바라보고 다음 세계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다.

맑은 세계에서 흐린 세계로 건너왔다. 평화롭고 조화로웠던 일상에 제주 여행은 혼돈과 불안의 파동을 던졌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도 모든 게 괜찮다고. 내가 문제 삼지 않으면 모든 게 다 괜찮다고. 조화로운 삶은 지속될 수 있다고. 내 세계는 경계 밖으로 더 확장될 수 있다고.

Astin과의 여행엔 혼란이 없다는 내 안의 명제가 부서지는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을 하는 내내 기록하고 싶었다. 돌아가서 글을 쓰고 싶다. 혼란의 경계 밖 세상을 탐험하고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혼란 속에 수집한 새로운 파동이 나의 일상을 변주시키고 새로운 통합을 이룩하겠지. 여행은 치유가 아니라 새로이 통합된 균형을 찾게 등 떠미는 경계선이었다.



2025.03.04 by St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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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마지막 날이 첫날 같았다니 너무 근사해요 스텔라님 덕분에 이 세계의 모든 매일 매일이 첫날이라는 걸 알게되네요:-)

우와 그러네요. 이 세계의 모든 매일이 첫날이네요! 와 신나라 ><

아름다운 글입니다.
저는 뭐 먹을까 그 궁리에 바쁜데요.

ㅋㅋㅋ 저 여행하면서 도잠님 생각했어요.

이번 제주 여행에서 '닭샤브샤브'라는 메뉴를 드시기를 강력추천합니다. 전 성미가든이란 식당에서 먹었어요. 또 중식도 괜찮으시다면 '자양식당'이란 식당에서 치킨 탕수육을 먹었는데 맛있었어요 ><! ㅋㅋㅋ

아하…. 감사해요!
적어 놓으렵니다. ㅎㅎ

여행을 통해 영혼이 성장하는군요! 전 집에서 개발만 하는데 좀 다녀야겠어요! 전 스텔라님 글을 통해 새로움을 느낍니다!

오오 맞아요. 여행할 때마다 점프하는 기분이 들어요. 아니 이런 멋진 말씀을🥹 제가 이타인님의 새로움 거울로 작용한다니 기뻐요💙

이럴수가 스텔라도 부수고 나아갔군요. 아름다운 파괴 후기예요! 저는 후보에 오른 파괴 대상들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어요.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결심들이 생겨났고요. 곧 현실에 나타나겠죠! 3월의 마지막에 후기를 남길게요. :-)

저도 라라님 글을 읽으며 뭔가 유사한 착상이 들어왔단 걸 느꼈어요. 너무 신기해. 파괴는 다음엔 파종이란 걸 알았어요. 잠시 숨고르고 있는데 곧 따라갈게요. 3월의 마지막날 후기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