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며 더 알게 되는 나 (feat 지독함)

in #kr23 days ago (edited)

나는 나를 참 좋아한다. 이 말에 어폐가 좀 있는데 '나'를 상정하는 안의 구체적인 내용물 보다는 '나'라고 여겨지는 틀을 뜯어보는 걸 좋아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경험과 기억이 혼합되며 불러 일으키는 감정과 생각의 상호작용으로 통합되는 느낌, 혹은 주관적인 해석, 새로 만들어지는 기억을 얻는 과정 자체를 낱낱이 살펴보길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냥 자아성찰하는 게 좋다. 그 말을 나는 보통 나를 지독하게 좋아한다고 말한다.

몇 가지 사고 방식이 상식에 벗어나는 인간으로 살면서 가독성이 높고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긴 쉽지 않다. 그런데도 쉽게 말하고 쉽게 쓰는 연습은 필요하지만, 몇 마디씩 덧붙이고 싶다. 아 다시 본론으로.

여행할 때 나는 또 나를 만난다.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하고 꽤 많이 안다는 착각이 드는 나의 새로운 부분이 도드라진다. 이번 제주 여행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날 극한의 스트레스로 몰고 갔다. 짧은 여행 기간 내내 비가 오는 건 처음인 데다가 비가 잠시 내리는 것도 아니고, 제주도가 면적이 꽤 커서 어떤 지역엔 비가 내리고 어떤 지역은 또 비가 내리지 않고 랜덤하고 다양하네... 차라리 아예 비가 내내 쏟아지면 마음이 편해질텐데 뭔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한 편, 제주 초심자로서 난이도가 심각하게 높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타로라도 가져와서 타로에게 물어봤을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내 마음이 편해졌을 것이다. 매일 매일 날씨를 점검하며 동쪽으로 가야하나 서쪽으로 가야 하나 북쪽인가? 남쪽인가? 불완전성이 이렇게 높을 수가!

내가 장기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장기 여행을 할 때 비가 오면 그냥 숙소에 짱 박혀 있다. 언젠가 날은 개일 테고 그때 놀러가면 되니까 기회가 많으니까 맘 편히 쉴 수 있다. 3주 이상의 여행이 아닌 한 나의 지독한 태도를-내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다 찾아내고 말테다 -내려놓을 수가 없다. 스스로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아니, 너 집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도 죄책감이 일도 없고 쉬는 데 조금의 초조함도 없는 게으름뱅이 아니었니? 갑자기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건데. 너 게을렀잖아. 아무 것도 안 해도 괜찮은 애잖아.

아, 생각해보니 나 되게 열심히 살면서 효용성을 추구하네. 효율성이 사회 기준과 다를 뿐이지. 매일 매일 날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최선을 매일 적극적으로 모색하며 거기서 쾌감을 얻는 변태같은 측면이 있다... 그리고 한 번 할 때 엄청 열심히 하기 때문에 쉽게 무얼 시작하지 않고 쉬는 것 뿐이다. 추진력을 얻기 위한 쉼이라고 할까.. 호랑이들 다 그런가요? 왠만큼 배가 고플 때까진 움직이지 않다가 한 번 움직이면 진짜 열심히 사냥하나요..?

누가 상 주는 것도 아닌데 그 날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여행을 한 게 아닌 것 같으면 속상한 인간이 바로 나구나. 지독하다 지독해.

둘째, 왜 나는 호스트를 자처하는가? 왜 모든 루트와 계획으로 상대방에게 만족감을 선사하고 싶어하는가? (물론 Astin보단 내가 여행에 익숙한데다 식당도 카페도 내가 찾는 게 훨씬 만족도가 높긴 하다. ) 그리고 나의 요상한 착한 마음과 상대를 위한 배려(?)가 스스로를 힘겹게 만들고 있다. 실상 음식에 그다지 뾰족한 선호나 취향이 없는 Astin은 어딜 가자고 하면 다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난 그 좋다에 우선 순위를 매겨둔다. 평소의 그의 습성과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코난처럼 유추한다.

말의 날엔 솔직한 감정이 휘몰아친다. 날씨가 선사하는 불확실성에 스트레스 받은 데다가 여행와서 제대로 산책도 못 하고 있다는 짜증스러움까지 섞여 Astin에게 애원했다. 제발 솔직히 말해줘. 해장국과 설렁탕 중 뭐가 더 좋으냐고 ㅠ_ㅠ... 그는 둘의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에 더 가까운데서 먹는 게 좋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해장국을 먹으러 갔다. 히스테리를 부리느라 어딜갈지 정하지 못한 덕에 어쩌다보니 협재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바다를 보니 기분도 좋아지고 날씨가 흐린데도 제주 바다는 옥빛이었다. 사진을 찍는데 잠시 햇빛이 비추고 순식간에 행복해진 나 자신. 비가 내내 왔지만 사려니숲에 가보았다. 숲을 한 바퀴 돌고 걷고나니 좀 살 것 같다. 제주도에 온 기분이 들었다.

참 얘는 꽤 단순한데 지독하고 질리는 부분이 있다.
그래도 조금만 행복해질 틈이 있으면 아주 쉬워진다.
그래도 Astin이 나와 아주 다른 사람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IMG_5659.jpeg

IMG_5650.jpeg

IMG_5630.jpeg

p.s. 제주에서 비가 온다면 사려니숲길로 가시길 추천합니다.

다 쓰고나니 이게 뭔 글이지 싶네요....

Sort:  

비 맞고 걷는 사려나 숲, 운치 있네요.
그게 스텔라님 매력인가 봅니다.

오늘 바다와 숲이 절 구원해주었답니다. 으헛... 매력이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 저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ㅋㅋㅋㅋㅋㅋ

여행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네요. ^^

여행을 통해, 다른 공간, 평범한 일상과는 다른 상황 속에서
평소에는 잘 몰랐던 나의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되고, 또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아요.

생각의 폭과 깊이를 더욱 넓힐 수 있는 크고 작은 모든 경험들이
스텔라님이 하시는 일에 긍정적인 자극(?) 및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뜻하지 않은 것들을 알고 가는 희안한 제주여행이에요. 이 모든 게 다 저에게 도움이 되겠죠? 😊 요거트님 말 덕분에 힘을 내봅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

마음의 준비 안 되면 시작 못하고 시작하면 잘 멈추지도 못하는 비능률 비효율 하얀 호랑이가 이 글을 좋아합니다...

아.. 역시 하얀 호랑이... 호랑이들이 움직이면 신나는데 멈춰있으면 곰 같지요. 비능률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호랑이, 하지만 한데모아 돌진하니 제 딴에는 최고의 효율이라고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