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감정] 05 아플 때 드는 감정
감기에 걸렸다. 분명 남자친구에게 옮은 게 확실하다. 얄밉게도 전날까지도 코를 훌쩍이던 남친은 내게 감기를 옮기자마자 다음날 바로 멀쩡해졌다. 나는 목에 복숭아씨가 걸린 것처럼 부어 물을 삼킬 때마다 곤혹스럽다. 투명한 콧물이 쥘쥘 새어 나왔다. 많이 아프진 않다. 그저 많이 추할 뿐. 그냥 평범한 감기에 걸렸다. 자꾸 눈꺼풀이 감긴다. 두 눈덩이 위에 뜨겁고 하얀 구름이 짓누르는 기분이다. 감기에 걸리면 뭔가 몸이 휴업 상태로 접어드는 것 같다. 오전까지만 해도 꽤나 힘들고 졸려서 반차를 써야 하나 고민했는데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버틸만했다. 일도 꽤 많아서 말을 꺼내기도 곤란했는데 다행이다.
3년 전까지는 내가 체력도 좋고 면역력도 강해 지나치게 건강하다고 생각했다. (몸의 균형이 맞지 않고 여기저기 고장 나 있는 건 논외로 친다) 수술을 한 적도 사고를 당한 적도 없고 몸이 아파서 입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링거도 맞아본 적 없다. 환절기 주변 사람들은 감기로 콜록대도 혼자 태풍의 눈처럼 멀쩡했고 겨울 꽁꽁 싸매고도 춥다고 덜덜 떠는 친구들이 신기했는데, 다 옛말이다. 최근 들어 피부병도 잘 나고 감기도 쉽게 걸린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의 육체는 어느새 약해졌다. 관리하지 않으면 쉽사리 고장나버린다. 나는 더 이상 건강에 무임승차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어리석게도 무방비 상태로 안심하며 지내온 내게 내 몸은 신호를 보낸다. 너 이제 더는 젊지 않다고.
웬만큼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감기는 어차피 약도 없다고 거부했는데 지금은 감기에 걸릴 기미가 보이면 약부터 찾는다.(판콜을 애용한다) 하루 푹 자고 일어나면 감기 따위 다 낫곤 했는데 이젠 회복이 더디다.
겨우 감기에 걸린 주제에 이런 글을 쓰기 부끄럽지만, 이왕 아픈 김에 계획에도 없던 아플 때 느껴지는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몸이 아프면 '아픔'이 우선순위가 된다.
모든 게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건강은 잃어봐야 소중함을 깨닫는다. 늘 후회가 동반한다. 몸이 아프면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사소한 신체 반응까지 예민하게 지각할 수 있다. 코에 잔뜩 끼인 이물감으로 숨을 내쉬기 불편하다. 입을 벌리니 들숨과 날숨이 오간다. 머리가 아프고 팔이 저리고 다리가 아파야 그때서야 거기 내 몸이 있었구나 인식한다. 마치 날 좀 알아달라는 듯 그동안 무심했던 주인에게 신체는 끊임없이 말한다. 그러면 아프지 않았던 어제의 나는 참 행복했구나. '아프지만 않으면 소원이 없겠다'란 생각이 든다. 아프면 사람은 소박해진다.
욕심냈던 일도 중요했던 일도 모조리 사라진다. 그냥 아프지만 않을 수 있다면 원래대로 몸 상태가 회복되는 게 지상과제가 된다.
아픔은 누군가의 인생에 전환점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성공한 사람 혹은 어느 날 인생을 180도로 바꾼 사람 중엔 죽을병에 걸린 후 과감한 선택을 한 사람이 심심찮게 있다. (지금 생각나는 건 꿈쟁이 김수영 작가이다. 암에 걸린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꿈 목록을 쓰고 삶이 바뀐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기도 하고 중요하지 않은 걸 포기하게 만들고 삶을 더 과감하게 맞이할 용기를 주기도 하나보다.
살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만나지만 육체의 고통만큼 직관적이고 즉각적이며 강렬한 자극은 없다.
죽음을 늘 곁에 있다지만 나를 포함한 평범한 사람은 살면서 저절로 죽음을 체감하지 못한다. 아픔은 상실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선사하고 죽음의 그림자를 상상하게 만든다. 신체의 한계를 일러준다. 무한히 이어질 것 같은 삶에는 끝이 있고 그게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르고 내 육체는 한 없이 연약하다. 어쩌면 신호일지도 모르겠다. 좀 더 몸을 그리고 인생을 소중히 대하는 게 좋을 거라는 경고이자 충고.
그래서 아파지면 사람이 그립다. 아픈 만큼 외로움을 주는 것도 없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누군가도 고열에 시달려 침대에 누워있다 보면 누군가의 손길이 그렇게 고맙고 반가울 수가 없다. 아플 땐 마음도 감정도 말랑말랑해진다. 연약해진 틈 사이를 채우기 위한 연민과 동정이 마구 필요해진다. 타지에서 씩씩하게 잘 살다가도 아프면 그동안 견뎌왔던 온갖 서러웠던 감정이 터져 나온다. 고차원적인 목표도 삶의 의미도 그 순간만큼은 끌어내려져 현재라는 일직선 상에서 단순히 바라보게 된다. '지금 나는 행복한가? 나는 무얼 위해 이렇게 달리고 있을까?' 생각보다 더 나약하고 불완전 나를 깨닫는 순간 위로하고 위로받기 위해 연민을 지닌 다정한 타인이 필요하다.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주고 등을 토닥토닥해줄 정겨운 타인이 말이다. (짝사랑하고 있다면 이것만큼 또 좋은 기회가 없다)
보통 적당히 아프면 난 멍해진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빨리 자고 빨리 이 몸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그래서 평소에 짜증날만 한 일도 싫은 사람도 신경 써줄 여력이 없다. 그런 거 보면 미움도 분노도 에너지가 맞나 보다. 아플 때는 내게 전력투구 해야 하니깐 타인에게 무신경하게 된다.
글을 다 쓰고 보니 무리하게 달려 나가는 누군가를 멈추기 위한 쉼표의 역할로 때론 아픔이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P.S. 어제 쓴 글을 조금 고쳤다. 여전히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글이 이상하다면 다 아파서 그렇다며 자기 합리화를 해본다. 그러나 지금은 몸이 많이 좋아진 상태다. 으흑...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셀프 위로.. 아프면 자신에게 관대해진다. :D
[안녕, 감정] 시리즈
01 입장 정리
02 감정을 드러내는 거리
03 평화의 날
04 다름에서 피어나는 감정
몸이 쉬어가라고 하는 것 같네요. 얼른 회복하셔요. :)
고맙습니다 P님 오늘은 많이 좋아졌어요. :D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였습니다.
감기엔 판콜인걸 이미 아시는군요 ㅎ
효과 빠른 감기약ㅋㅋㅋ
여기 판콜 마니아가 한 분 더 계시는군요 ^_^ㅋㅋ
<-공감 백배 ㅎㅎ ㅎㅎ
전 아플 땐 서러워져 쉽게 울어요~ ㅋㅋㅋ
아프면 안그러셨던 분도 예민해지죠. 울리기 좋은 날 ㅎㅎㅎ 누군가의 눈물을 보고 싶다면 아플 때를 공략해야겠군요 ㅎㅎ
아프지마요 저도 최근에 건강이 안좋아져서 운동과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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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억 ㅠ 건강이 나빠지셨다니 푹 쉬시고 운동하면서 회복하시길 :D
어... 저도 재채기와 콧물 범벅인데.... 하루 지나면 낫겠지 했는데 여전 그대로네요. 머리가 머엉해요. 내일은 괜찮아지겠쥬. 좀 쉬어야 하나봐요.
도잠님도 감기걸리셨군요 ㅠㅠ 날이 다시 추워져서 많이들 감기걸리나봐요- 오늘은 좀 좋아지셨길 빨리 나아요.
아프지 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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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스팀잇을 할만큼 아프지 않습니다. ㅋㅋ trueimagine님도 아프지마요 ^_^
자신의 마음이 아픈걸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죠
아픈데 무리하지마시고 푹 쉬세요~^^
몸은 티가 나지만 마음은 티가 안나죠. 감사합니다
흠흠..감기엔 광ㅇ제약 쌍화탕 아닌가요? ^^a
얼른 나으세요!
저는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가 생각나네요
파울로 코엘료 책은 다 비슷비슷해서 더 이상 안읽지만 이 책은 필요한 순간 읽어서인지 삶을 바라보는 제 관점도 달라졌어요 ^^
sklara님 저도 쌍화탕 좋아합니다 ㅋㅋㅋㅋ 쌍화탕매니아 맛있지 않나요?
파울로 코엘료 전 아직도 좋으합니다 비슷비슷한 것도 사실 ㅋ 저도 딱 필요한 순간에 베로니카죽기로 결심하다를 읽어서 남의 일 같지 않네요. 그런데 요새 다시 무언가 인생책이 필요해지는 순간이에요. ㅎㅎㅎㅎ
아플 땐 그저 푹 쉬는 게 최고에요.
머리도 안 돌아가고, 몸도 무겁고..
얼른 완벽 컨디션으로 복귀하시길!
푸욷 쉬고 감기도 완전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당!
요새 유난히 직장에서 난리가 나서 마음이 심난해여ㅎㅎㅎ 완벽한 컨디션 오는 날이 또 오겠져..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