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더 폴, 디렉터스 컷(스포일러 포함)
“고모 이야기 놀이해요!”
벌써 10살, 13살로 둘 다 십대로 접어든 조카들이지만 나를 볼 때 마다 아직도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 몸으로 노는 게 힘이 부쳐 누워서 시작한 놀이였다. 우리는 때로는 각자 초능력을 가지고 세계를 탐험하기도 하고, 시공간을 초월해 과거와 미래를 오가기도 하고, 억울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탐정이 되기도 한다. 내가 시작하지만 우리 모두가 등장인물인 만큼 조카들은 자유롭게 이야기에 간섭하고 자기 스타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작은 조카가 더 어렸을 때는 이야기가 유독 더 산으로 가기도 했지만 상관없다. 어떤 이야기인지 보다 우리가 같이 ‘이야기’를 만든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예로부터 이야기는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했다. 이야기가 사람을 살리는 대표적인 이야기는 천일야화, 아라비안 나이트가 아닐까? 여성을 증오해 매일 새로운 여인과 결혼해 다음 날 처형하던 페르시안의 왕을 멈춘 건1,001일 간 이어진 셰헤라자드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더 폴을 보면서 새삼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를 실감했다. 이야기는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한다. 이야기를 잘못 휘두르면 타인을 죽일 수도 있다.
더 폴 영화 속 로이가 알렉산드리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섯 무법자의 환상적인 모험이고 그 중에는 로이가 고스란히 반영된 캐릭터가 등장한다. 보통의 화자는 자기가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는 힘이 있기에 대부분 히어로이거나 초능력을 가지고 세계를 좌지우지 한다. 조카들과 나의 이야기 놀이가 그렇듯이. 로이의 이야기는 히어로물처럼 시작했지만 모두가 죽고 마는 파멸극으로 치닫기 일보직전이다. 이야기가 자신을 담은 그릇이라고 친다면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로이의 그릇은 산산조각 나는 것 외에 다른 결말이 보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언제인지도 모르겠지만 거대한 자루에서 뿅하고 나타나 이야기의 일부가 된 알렉산드리아는 그의 이야기를 바꾸고 그를 구원한다.
“왜 모두가 죽어요?”
“내 이야기니까.”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
시작은 로이의 이야기였지만 알렉산드리아가 그 이야기가 파멸로 가지 않게 막는다. 그녀의 개입이 로이의 이야기를, 로이를 살린 것이다. 영화는 제목답게 떨어지는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스턴트맨인 로이의 추락부터 시작해, 이야기 속 무법자들도, 알렉산드리아도 추락하고 떨어진다. 죽음과 좌절이었던 하강의 이미지는 마지막에 전복된다. 다시 스턴트맨으로 복귀한 로이의 추락은 삶이고 희망이다. 사람을 살리는 건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야기로 이어진 진실된 관계, 사랑의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를 살리는 이야기를, 사랑이 넘치는 이야기를 함께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