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2] 돌이킬 수 없는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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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톤먼트 / Atonement / 2007 / 영국
소설가의 머릿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오래 전부터 늘 경이롭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을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한 허구의 세계를 창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차마 속에서 간질거리는 말들이 선뜻 튀어나오지 않았다. 우선 중간 단계에서 소설의 언어를 습득할 필요가 있었다. 전시한 사진을 기반으로 소설과 에세이, 그 중간 어딘가의 형식으로 적어본 첫 이야기들은 아트북 형식으로 매우 소량만 제작했다. 지금까지 8점의 사진을 단편 이야기로 치환시켜보았는데, 앞으로 100점 정도는 더 써봐야 할 것 같다.
단순히 속을 간지럽히는 말도 바깥으로 꺼내기가 쉽지 않은데, 여기에 죄책감까지 실리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수십 년동안 언어로 쏟아지지 못한 말이 그의 시간을 흐르지 못하게 붙잡는다면. 영화 <어톤먼트> 속 브라이오니는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하던 소녀다. 그 세계에서 그녀는 감독이자 신이다. 하지만 어린 판단력으로 불확실한 일을 섣불리 증언하고, 언니 세실리아와 그녀의 연인 로비의 사랑을 박살내고 만다. 로비가 경찰에 끌려가고 난 후 3년 반이 흐르고, 로비는 감옥살이 대신 군복무를 택해 전장을 떠돈다. 간호사로 일하는 세실리아와 재회한 로비는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쪼개어 못다한 사랑을 이어간다. 전쟁터에서도 모든 걸 바로잡고 세실리아와 함께할 미래를 그리면서.
시간이 지나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18살의 브라이오니는 대학에 입학하지 않고 언니처럼 병원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는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타자기와 함께. 완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글을 밤마다 써 나간다. 나이가 들어 소설가로 성공한 브라이오니는 마지막 소설로 마침내 자신과 세실리아, 로비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용서를 구할 새도 없이 전쟁터에서 후송작전 마지막 날 패혈증으로 생을 마감한 로비와 발햄 지하철역에 투하된 폭탄으로 수도관이 터져 익사한 세실리아. 두 사람의 재회는 브라이오니가 책에서 덧붙인 허구였다. 한 번도 제대로 둘 만의 시간을 보낸 적 없는 두 사람을 위해 책 안에서 사실을 밝히고 실제와 다른 행복한 결말을 지어 평생동안 안고 있던 죄의 무게를 덜어낸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하고 오래 일을 해도 내가 한 일에서 도망칠 수가 없어."

"어떤 의미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에 만나던 사람과 함께 알던 지인이 있었다. 헤어지고 한참 뒤에 그 지인을 만나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걸 나에게 말하지 못해 그 지인은 늘 괴로웠고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지금이라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긴 이야기 끝에 지인은 비로소 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미 지난 인연으로 정리가 끝난 뒤였지만, 지인이 토스한 괴로움의 무게가 그때 나에게 단 한 움큼도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인에게 잘했다고, 괜찮다고 말은 건넸지만 뒷기분이 좋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그 지인과의 인연도 그 정도까지라는 것을. 어쩌다 한번씩 안부를 물을 순 있지만 내가 먼저 묻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고, 그 이상의 좋은 관계는 될 수 없을 거라고. 영화의 마지막에 노년의 브라이오니가 인터뷰를 하는 장면에서, 나는 우습게도 그 일이 떠올랐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써나가는 글. 왜 진작 용서를 구하고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냐고 따질 수 있겠지만, 세상에는 그런 타이밍이 있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른 뒤에, 그렇게밖에 고백하지 못하는 상황 말이다. 제대로 속죄할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숨을 거둘 때까지 그 생애 전체가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이 된다. 인생에는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난다. 그안에서 최선을 다해 옳은 선택을 하고, 타인을 할퀴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자신의 잘못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이 더욱 귀해지고 있는 듯하다. 잘못이 정말로 '잘 몰라서' 벌어지는 경우도 많다. 영화가 끝나고 세실리아가 로비와 함께 머물고 싶어했던 바닷가 마을의 별장 사진이 크게 걸린 갤러리에 혼자 서 있다. '우리 이야기는 계속 될 거야.' 로비가 편지에 썼던 말이 흘러간다.

너무나 아름다운 동시에 겨울 칼날같이 마음이 찢어지는 영화였는데요 (처음엔 브리오니가 미웠는데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싶어요) 채린님은 어떤 일이 떠올랐군요.
저에게도 소설은 신비하고 호기심어린 영역인데 앞으로 채린님이 쓰실 이야기가 기대가 되어요.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 될거야. 이 영화의 여운이자 위로, 해피엔딩이 된 대사처럼요.
저런 맹랑한 기집애가! 하고 저도 화가 났어요ㅎㅎ 어쩔 수 없는 현실들이 겹겹이 쌓여감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글을 완성해서 자기의 가장 빛나는 재능으로, 누군가는 함부로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속죄에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정말 마음 찢어지는 영화였네요.
소설에 대한 호흡이 길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끝나지 않을 이야기처럼 써 내려가다보면 언젠가는 길이 보이겠죠? :) 일단 한번 비밀스럽게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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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잘못을 읽을 줄 모르는 시대라는 말에 공감이 됩니다.
잘못을 알려주고 유저가 현재의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을 알려주는 ai가 나온다면, 세상은 좀 달라질까요ㅎㅎㅎㅎ 우선 저부터 감기는 눈을 잘 뜨고 있어야겠습니다! :)
인생이라는 대하소설을 쓰고 있고. 그중에 '스팀시티'라는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는데, 이것은 공동창작물이라 사람들이 쓰다가 말다가 해요. 그러나 계속 쓰는 이들이 있어 쓰다가 말다가 한 사람들의 흔적이 계속 전달되고 있는데. 그게 마법사가 건, 저주일까요? 축복일까요?
오, 이것은 마치 플레이 중에 설계자의 메시지를 만난 것 같은. :) 그렇다면 스팀시티를 향해 걸어보기로 결심한 참여자의 마음으로 답변해보겠습니다. 4개의 주제, 100번씩의 수행. 총 400개의 여정을 건너가고 있는데, 저는 이것이 인생 위에 붙은 인덱스 스티커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주일지, 축복일지는 결말 페이지를 열어보아야 하는데, 400개의 여정을 거치는 동안 이미 참여자의 인생이 누군가 흔들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해져 있을 것 같아요. 번호를 붙여서 기록하지 않았다면 인생 중에 흩어졌을 기억들이, 마법사가 건네준 틀로 속속 채워지는 것이지요. 이미 이 자체로 참여자로서의 만족은 충분하답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더 성장해있을 미래의 나에게 맡겨두고, 지금은 주어진 과제를 충분히 즐기고 싶어요ㅎㅎ 일단 저의 재미에는 자꾸만 닿게 되니, 저주라 해도 끝까지 가보렵니다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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