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공부 #2

in #philosophy18 days ago (edited)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의 무의식

우리는 흔히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모든 행동과 판단이 명확한 의식과 숙고의 결과라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18세기 영국의 사상가 제레미 벤담의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통념에 도전하는 흥미로운 시각을 만날 수 있다. 벤담은 인간의 마음을 '의식', '무의식', '허위의식'이라는 세 가지 상태로 분류하며, 특히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 행위의 복잡성을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벤담에게 '의식'은 어떤 상황이 존재한다고 믿고 실제로도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의자에 앉아 있다."와 같은 상황이다. 반면 '무의식'은 어떤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는 상태인, 예컨데, 마치 내가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그 노래를 왜 흥얼거리는지는 모르는 경우와 비슷하다. '허위의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나 상상하는 상태로 예를 들어, "내 지갑은 항상 텅 비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돈이 들어있는 경우다. 흥미로운 점은 벤담이 이 세가지 마음상태에 대해 단순한 심리 분류를 넘어, 새로운 입법과학, 즉 법률 체계를 구성하는 실험적 과업에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벤담의 '무의식'은 우리가 흔히 아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같을까? 벤담의 무의식 개념을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미리 상정하고 접근하는 것을 경계했다. 대신 벤담이 정의한 무의식의 의미를 '행동', '성향', '법(규칙)'이라는 세 가지 맥락에서 파고들었다.

벤담은 인간 행동을 분석할 때, 행위 자체, 상황, 동반했을 의도, 그리고 의식/무의식/허위의식 여부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무의식은 '숙고하지 않은 행위'의 영역에 속한다. 어떤 행위가 특정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이루어지는 상태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지각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단계를 넘어, 존재하는 것을 지각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를들어, 의도적으로 해코지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본인도 모르게 발이 걸려 넘어지며 남을 밀쳤다. 이럴 때 그 사람은 '무의식' 상태에서 행동했다고 볼 수 있다.

벤담은 인간의 '성향'을 관념들의 연합에서 나타나는 규칙성, 즉 정신의 '사유적 습관'으로 설명한다. 그는 '쾌락과 고통에 대한 관념만이 동기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며, 동기를 미래의 쾌락이나 고통에 대한 '기대'로 정의한다. 여기서 벤담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조차도 사실은 이런 습관이나 언어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느낌(feeling)이 동반하지 않는 관념들은 내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없다'고 말하며, 모든 동기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즉, 벤담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알고' 있지 않아도, 우리의 '느낌'이나 '기대', 그리고 '습관'이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벤담은 '반성의 초월성'이라는 믿음에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이는 우리의 의식이나 이성이 모든 것을 투명하게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의미하는데, 벤담은 의식과 허위의식이 결국 언어와 습관이라는 '인공적 구성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들뢰즈의 '수동적 종합'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의식이 능동적으로 모든 것을 구성하기 이전에, 감각적 인상이나 경험들이 서로 얽히면서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패턴이나 습관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벤담은 객관적인 지식 또한 사람들의 '습관'에 의존한다고 보며, 애덤 스미스의 '공평무사한 관찰자'와 같은 절대적인 객관성 기준에 의문을 제기한다.

마지막으로 벤담은 법이 효력을 가지려면 시민들의 '복종의 습관'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습관은 '공리의 원칙'에 따라 사회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벤담은 "마땅히 존재해야 할 의식의 부재는 의도성의 영(zero)도에서 행동의 발생 과정을 원천적으로 재검토하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법을 만드는 입법자들이 인간의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측면까지 고려해야 함을 시사한다.

벤담의 무의식 개념은 단순히 심리학적 호기심을 넘어, 인간의 행동과 마음, 그리고 법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인간의 행위가 늘 의식적인 숙고의 결과가 아니며, '습관'과 '성향', '느낌'과 같은 무의식적인 요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반성의 초월성'이라는 신화에 도전하고, '오성의 논리' 속에 숨어있는 무의식의 그림자를 밝혀냄으로써, 벤담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법과 도덕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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