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teem]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 오직 노동자들끼리 회의와 토론으로 전제 봉건주의를 뒤집은 유일한 혁명

in #kr7 years ago (edited)

계급갈등이나 혁명의 시기 조차도 '국가간 전쟁'은 항상 기존 국가권력을 강화하고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 모는 역할 을 했다. 전시에 함부로'정의'를 요구하다 빨갱이 또는 반동으로 몰려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인류 역사에, 딱 한번 국가전쟁조차도 조롱하며 '너나 가서 싸워라' 고 소리친 농노,노동자들이 있었다.

광주에서 베트남에서, 베네수엘라에서 .... 수많은 군인들이 상관의 명에 복종하여 [자기 국민에게] 혹은 남이[적이라고 명명함 사람들에게] 총을 쏘았지만, 딱 한번 사병들이 회의를 통해 서로를 살해 하기를 거부하는 결정을 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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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월 혁명의 증거물

오로지 민중농민,노동자만의 힘으로 봉전주의를 극복한 유일한 사례

1917년 10월의 러시아에서 세계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혁명이 일어났다. 1789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혁명이 부르주아들의 혁명이었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의견을 일부라도 수용한다면, 볼쉐비키의 10월 혁명이야 말로 인류역사상 진정한 변화를 일으킨 최대의 사건이었다.

스탈린이 망쳐버린 그림 같은 혁명의 정석

스탈린이 그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았다면 레닌이 세운 그 농민, 노동자의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모습은 아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자본도, 지식도, 군대도 소유하지 못한 민중이 어떻게 스스로의 힘으로 봉건체제를 뒤엎는 것이 가능했을까? 일부 보수적인 논객들이 주장하듯 단순한 폭동 볼쉐비키가 민중을 현혹하여 일으킨 부장 폭동에 지나지 않을까? 그래서 당연하게도 스탈린 독재국가가 등장한 것일까? 이 의문점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혁명을 기록한 모든 책들 중에서 단연 최고”로 꼽히는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페드로그라드에서 볼쉐비키와 러시아 민중이 그 날 그 날 한 일들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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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최대 미덕은 기자 특유의 생생한 현장감이다. 존 리드는 혁명 러시아의 수도인 페드로그라드와 그 주변 도시들, 혁명의 두 번째 격전지였던 모스크바까지 곳곳을 누비며 이 책을 기록했다. 레닌, 트로츠키등의 볼쉐비키 지도자들과 병사들, 공장 노동자들, 농민들까지 러시아 혁명의 수많은 주인공들이 이 책에 등장한다. 또한 존 리드는 미국인 기자라는 신분을 이용해 귀족, 반혁명 장군들과 케렌스키, 사회혁명당, 멘셰비키 같은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은밀한 고백까지 담아낸다.

“스탈린 독재가 왜곡하고 정권 유지의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전용한 1917년 혁명의 진실한 모습, 혁명 러시아가 하나의 입체적 그림처럼 다가온다.” 박노자

볼쉐비키 주도 10월의 무장 봉기는 얼마나 많은 노동자, 병사의 지지를 받았을까?

볼쉐비키당은 “대중 의지의 궁극적, 정치적 표현”이었을까? 무장 봉기를 결정하는 과정은 인위적이지 않았을까? - 이 책은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증거물이다. 존 리드는 주장이 아닌 증언을 모으는 작업을 감행했다.

레닌이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기꺼이 추천”한 이 책이,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는 금서가 됐다. 혁명 과정에서 실제로 별로 한 게 별로 없으면서도 혁명의 열매를 독차지해서 세계를 뒤흔든 혁명의 의미를 퇴색시킨 독재자 스탈린은 이 책을 두려워했다.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혁명의 의미를 사람들이 되새기게 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레닌이 이 책의 추천사에서 말한 것처럼 “독자들은 1917년의 사건들을 생생하게 담아낸 이 책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프랑스 혁명과 볼쉐비키 혁명의 비교

프랑스 시민혁명은 수정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사실은 민중이 아닌, (자유주의적)귀족과 부루주아지가 그 주축이었다. 테니스 코트에 모인 삼부회 제 3신분의 부르주아들이 국민의회를 주도하면서 전제적 절대왕정을 대항하여 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힘은 미약했다. 그러나 파리 민중의 폭력적 개입으로 이들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일어난 농민혁명은 부르주아들을 당황하게 했고 탄압받는다. 부르주아지는 회의를 통해 ‘봉건제를 폐지’한다고 선포한다. 그러나 이 혁명의 진짜 목적은 1791년 제정된 헌법을 보면 드러난다.

알고보면, 농민,노동자와는 상관없는 혁명이었다.

농민들의 봉건적 공납을 폐지했으나 ‘유상 폐지’였다. 중소 부르주아 미만의 돈이 없는 농민들은 예외였다.
참정권도 직접세를 납부할 수 있는 능동적 시민에게만 부여했다.
몰수된 교회재산도 큰 덩어리로 매각됨으로써 부유한 자영농과 부르주아지의 차지가 된다. 혁명의 혜택은 입법의회를 주도한 지롱드 파 즉 자유주의적 귀족들과 대 부르주아지 들이었다. [은은기.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이해]참조하여 발췌 편집 ]

1832년의 파리의 혁명 현장을 기록한 빅토르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보면 이 때에도 혁명의 뒤에 부르주아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메네트리예 거리의 바리케이드에서는 옷 을 잘 차려 입은 한 사나이 가 일하는 일꾼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그르네타 거리의 바리케이드에서는 말을 타고 나타 난 한 사내가 그곳 지휘자인 듯한 살메게 돈 꾸러미를 건네며 “이건 비용, 술값등에 쓸 돈이요”하고 말했다. [레미제라블. 4권 p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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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은 혼란과 탐욕, 방탕함 즉흥성이 숭고한 민중의 항쟁 속에 뒤섞여 있다.

그것은 예상되었던가? 그렇다. 그것은 준비되었던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포도에서, 반란이 모의의 성격을 띠고 있고, 즉흥적인 성격4을 띠고 있다. 누구든지 그것을 제멋대로 몰고간다. 그 시초는 일종의 무서운 쾌활이 섞여있는 공포로 가득차있다. 먼저 소음이 일어나고, 상점문이 닫히고, 진열된 상품들이 자취를 감춘다. 총소리가 들리고, 개머리판이 대문을 두드린다. 식모들이 시시덕거리며 말한다.“난리가나려나봐. ... 거리에는 피를흘리고 시체가 쌓이는데 한쪽에서는 당구를 치며 떠들고 있다. ... 사실상 이 폭동을 지휘했던 건, 그것은 공중에 떠있는 일종의 미증유의 격정이었다. 반란은 한 손으로 바이케이드를 구축하고, 다른 손으로 한 시간도 안 되어 초소들을 점령해 버렸다.-빅토르위고. [레미제라블]4권

그러나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지와 지식인, 귀족들의 도움 없이 민중에 의해 일어났고 성공한 최초의 혁명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정말 그들의 도움이 없었을까? 이것은 현장을 취재한 기자들이 아니면 추측하기 어렵다.

러시아에는 부르주아 자본가가 없었다.

20세기 초 사회주의 혁명은 많은 혁명가들의 기대 혹은 예상과는 달리 자본주의가 발달한 프랑스 같은 서유럽이 아니라 유럽의 변방국가인 러시아에서 발생하였다.

기존 연구 방향:왜 볼쉐비키가 성공했나?

기존의 혁명사 연구는 상대적 후진국인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한 것을 주로 사회민주당 및 노동운동의 강력한 조직성과 전투성에 주목했다. 러시아 혁명사에 대한 연구는 왜 볼쉐비키가 승리를 했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부르주아지가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 러시아에서는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서의 부르주아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상인도 귀족도 짜르도 한 통속이었다.

상인들은 짜르나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공업자본은 주로 귀족들에게만 부여되었는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귀족은 스스로 기업인으로 진출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자신을 자본가로 인식하지 않았으며 봉건적 지주로서의 정체성을 고수했다. 다른 기업가들도 농노출신이 많았고 사업가로부터 적극적인 정치적
활동의 전개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들은 체제에 대한 저항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이 러시아정교회 교인으로써 짜르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고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녔다. 따라서 이들도 부르주아적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았고

민중을 대변하거나 민중과 연합할 계층은 전무했다.

하지만 볼쉐비키 혁명은 끝없이 이어지는 민중의 탐구, 토론, 학습 그리고 고뇌와 결단을 통해 민중의 행동이 혁명으로 이어졌다.

매순간 진지한 토론과 목숨을 담보한 결정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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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위해 전쟁에 나갈 것인지, 광장에 남을 것인지, 어느 편에 설지, 무장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반혁명 세력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매순간 진지한 토론과 목숨을 담보한 결정이 이어졌다. 볼쉐비키 형명은 더할 수 없을 만큼의 비참함에서 비로소 일어났으므로 비교할 데 없을 만큼의 끈기와 순결함, 간절함으로 이어진 열정의 혁명이라고 평 할 수 있을 것이다. 볼쉐비키 혁명에 대한 이런 긍정적 판단은 이제서야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읽고 발견한 두 혁명의 차이점이다.

프랑스 혁명이 봉건적 왕정과 그 군대에 저항하여 세워진 시민들의 바리케이트로 상징된다면 러시아 혁명은 창고와 광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 농민, 군인들의 뜨거운 토론과 설득이다.

정열과 순수로 이룩한 소비에트 정부가 스탈린에 의해 독재와 탄압으로 얼룩져버린 역사적 사실이 더더욱 아쉬운 이유이다.

3. 혁명기 러시아의 기업가들

러시아의 첫 사적 기업가는 압도적인 수가 외국인이었다.

표트르대제 이후 러시아인이 점차 기업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공업화는 농민출신의 기업가가 두드러진다. 19세기 중반 모스크바의 경우 상인출신이 기업가 층의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뒤를 이어 농민, 농노 출신이 많았다. 상인은 전통적으로 짜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짜르의 손님’이란 뜻의 고스티(гости)라고 불린 대상인은 짜르를 위해서 큰 규모의 사업을 맡았다. 이 사업은 몇몇 특권과 결부되어 있었고, 짜르는 상업 활동에 통제와 간섭을 가했다. 또한 짜르는 의도적으로 외국상인들을 고스티와 반목시킴으로써 상대적 이익을 추구했다.

19세기 중반부터는 페테르부르크의 금속가공회사등은 국가에 종속되었고

사회적으로 농노출신인 사업가들, 전통적으로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인들, 스스로 기업인으로 진출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자신을 자본가로 인식하지 않았으며 봉건적 지주로서의 정체성을 고수한 귀족출신 공업인들 중 어느 누구도 부르주아적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았다.최대희. 2005.[ 러시아 부르주아지와 1917년 러시아혁명]
최대희. 2005.[ 러시아 부르주아지와 1917년 러시아혁명]

자세한 설명은 여기에로

전통적 모스크바 기업가는 민족주의였다.

전통적인 섬유공업 및 식품공업에서 출발한 모스크바 기업가 형은 결코 지배권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들은 1917년까지 대부분 가족경영의 형태를 벗어나지 않았다.이들은 전통적 사고방식에 젖어서 근대적 주식회사의 전문경영인인 페테르부르크 부르주아지를 자신과는 다른 일종의 ‘관료’로서 경멸하였다. 주로 구교도 농민 및 슬라브주의적 상인으로부터 신분상승한 모스크바 기업가 형은 ‘민족주의적’으로 사고했다.
이 기업가들은 페테르부르크의 기업들과 연대하지 못했고 반목했으므로 정치적으로도 혁명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고 할 마음도 없었다.

4. 당시 러시아 정당과 정치단체들

당시 러시아 정당과 단체들을 명명하는 단어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책을 이해하기 힘들다.
자세한 정당 설명은 여기

  1. 정당
    페드로그라드의 제헌의회 선거에는 17개의 정당들이 참여했다. 어떤 지방도시에서는 40여 개의 정당들이 경쟁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이 책에 언급되는 단체와 정파만을 소개하며, 정당의 강령, 지지층의 일반적 성격만 짧게 설명한다.

  2. 카데츠(Cadets).
    입헌민주당 에서 따온 말. 공식 이름은 '인민자유당'이다. 유산 계급 내 자유주의자들이 짜르 시대에 결성한 카데츠는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거대 정당이었다. 1917년에 2월 혁명이 발발하자, 카데츠는 첫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밀류코프, 비나베르, 샤츠키 등.

  3.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본래부터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정당. 1903년 전당대회에서 전술 문제 로 다수파와 소수파로 양분됐다. '볼쉐비키'와 '멘셰비키'는 여기서 유래한 이름이다

a.멘셰비키.
다양한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하는 정당. 사회는 자연 진화를 통해 사회주의에 도달하며, 노동계급은 정치권력을 먼저 장악해야 한다고 봤다. 민족주의 정당이기도 하며, 사회주의 지식인들로 구성이 됐다. 모든 교육 수단을 손에 쥔 것이 유산 계급이었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교육 과정을 통해 본능적으로 유산 계급 편에 서곤 했다. 단, 리베르, 체레텔리 등.

c.볼쉐비키.
볼쉐비키는 즉각 프롤레타리아 봉기와 정권을 장악해 산업 토지 자원 금융기관을 무력으로 접수하고, 이를 통해 사회주의의 도래를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스로를 공산당이라 부르며, 주로 공장 노동자들과 가난한 농민들을 대변했다. 레닌, 트로츠키, 루나차르스키등.

  1. 사회혁명당.
    SR. 원래는 농민들의 혁명적 정당이자 테러리스트 전투 조직이었다. 2월 혁명 이후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이 많이 가입했다. 사유재산의 폐지가 토지에만 적용돼야 하며, 지주들도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렌스키, 체르노프, '바부쉬카' 브레쉬코프스카야등.

  2. 사회혁명당 좌파.
    이론적으로 볼쉐비키의 노동계급의 독재 강령을 공유했지만, 처음에는 볼쉐비키의 무자비한 전술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서자 내각(농림부 장관)에 참여했다. 농민들이 가장 큰 농민 정당으로 올라서게 된다. 이들은 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했다. 스피리도노바, 카렐린, 캄코프, 칼라가예프 등.

6) 소비에트.

'평의회'. 짜르 시대의 제국 평의회는 고수다르스트벤뉴 소비에트라 불렸다. 그러나 혁명 이후 소비에트는 노동계급의 경제 조직에서 선출한 대표들의 의회,

즉 노동자 소비에트, 병사 소비에트, 농민 소비에트만을 지칭했다.
수도에는 전국 소비에트, 심지어 각 주와 자치구에도 소비에트가 있었다.

  1. 노동조합.
    러시아 노동조합은 형태상 산업별 노동조합이었지만, 여전히 직업별 노동조합이라고 불렸다. 일종의 러시아 노동연맹.

  2. 공장위원회.
    혁명으로 경영이 붕괴됐을 때를 이용해, 노동자들이 직접 산업을 통제하려고 만든 자발적 조직. 그 기능은 혁명적 행동으로 공장을 접수하고 가동하는 것이었다. 공장위원회들도 전국 조직과 페드로그라드에 중앙위원회를 두고 노동조합과 협력했다.

  3. 두마.
    '심의기구'. 옛 제국 두마는 [2월] 혁명 이후에도 민주화된 형태로 6개월간 존속했지만, 1917년 8월에 자연스럽게 소멸했다. 이 책의 시 두마는 '시 자치정부'라 불린 시의회를 재조직한 것이다.
    .....중략

  4. 적위대.
    무장한 공장 노동자들. 1905년 혁명 당시에 처음 결성, 1917년 2월에 도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재등장. 그들의 무장을 해체하기 위한 임시정부의 노력은 모두 실패했다. 적위대는 훈련도 받지 않았고 규율도 없었지만, 혁명이 큰 위기에 처할 때마다 혁명의 열정만으로 거리로 나왔다.

  5. 백위대.
    볼쉐비키의 사유재산 폐지에 맞서기 위해 혁명의 마지막 단계에 등장한 부루주아지의 지원병들. 대부분이 대학생이었다.

6. 볼쉐비키 혁명의 원인

볼쉐비키의 등장과 관련해 우리는, 러시아의 경제와 군대가 1917년 10월 25일에 갑자기 해체된 것이 아니라, 몇 달 전, 더 길게는 1915년부터 시작된 과정의 논리적 결과로 해체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러시아 제국은 철저한 전제 군주전제 주도하에 근대화 개혁이 진행되었으나 사회구조를 바꾸는 개혁안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자유주의 운동 및 사회민주당을 결성하였다.

1) 피의 일요일

노조요구 시위대를 학살하다.

1905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정교회 사제가 주도하는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1905년 11월 22일 사제 가폰 신부를 필두로 수많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노동조합의 설립과 근로조건의 향상들을 아버지 차르에게 요구하였으나, 비무장한 시위대를 상대로 차르의 군대가 발포하였고, 달아나는 군중들을 기마대가 추격하여 학살, 이날 하루에만 3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곧 불만이 폭발했다.

  • 포템킨 호의 선원들이 반란
    1905년 5월 흑해의 포템킨 호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루마니아 정부에 항복했다. 또한, 자본가의 착취와 노동자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열악한 근무환경에 맞선 온갖 파업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1906년 한 해 동안 100만 명이 파업을 일으켰고 농민 반란이 2600건이나 일어났다. 이에 러시아 제국정부는 '두마'를 설치하는 등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두마는 농민들을 대변하지 않았다.

무리한 파병과 불황

차르에 대한 불만세력이 여전하다고 여긴 니콜라이 2세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무렵, 국내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많은 병력을 파병하도록했다. 민중들은 애국심에 불타서 1500만 명이나 전선에 지원 했었다. 하지만, 지휘관들의 무능함으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자멸적인 대패를 초래했고, 젊은이들이 빠져나가자 노동력은 급격히 저하되었으며, 전쟁비용으로 인해민중들의 생활은 피폐해 졌다.

2) 1917년 3월 그레고리력으로 2월혁명

혁명, 페드로그라드 시위

페드로그라드의 민중들은 빵과 우유를 배급받고자 시민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줄을 서야 했다.
3월 8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었는데, 페드로그라드 여성들은 이날 빵과 우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그들과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이 8만명이나 시위에 가담하였다. 시위는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로 이어졌다. 민중들의 시위는 전쟁에서 돌아오거나 민중시위 진압을 거부한 일부 사병들이 참여하면서 ‘페드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로 단결하는 혁명으로 발전하였다.

1917년 2월 22일 푸틸로프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고

수도방위사령관 군대를 보내 진압하도록 하였으나

2월 27일 군대까지 노동자들의 편에 섰다.

결국 3월 2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동생 미하일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3월 8일의 혁명으로 폐위되었고, 제정체제가 붕괴되었다.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자들의 연합 정권인 케렌스키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왕실의 부패한 반동주의자들은 독일과 단독 평화조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러시아를 고의로 파괴하려 했다.

1915년 여름의 패배를 불러온 전선의 무기 부족, 군대와 대도시의 식량 부족, 1916년 생산과 운송의 붕괴 등은 반동 세력이 주도한 대규모 방해 행위의 일환이었다. 이 사태를 2월 혁명이 저지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억압받던 1억 6천만 명의 사람들이 단번에 2월 혁명을 통해 자유를 누리게 되면서,

새 체제는 첫 몇 달 동안 혼돈에 휩싸였다. 그러나 국내 상황과 군사력은 점차 좋아졌다. 하지만 '밀월'은 길지 않았다.

자본 계급은 자신들이 짜르의 권력을 대체하는 정도의 혁명만을 원했다.

그들은 러시아가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국이 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대중은 산업과 농업에서도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원했다.
윌리엄 잉글리쉬 윌링은 1905년 혁명을 다룬 에서, 훗날 볼셰비즘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 러시아 노동자들의 심리 상태를 매우 잘 묘사했다.

그들(노동자들)은 아무리 자유를 허용하는 정부라 할지라도 그것이 다른 사회계급의 수중에 놓이면,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릴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 러시아 노동자들은 혁명적이었다. 그러나 폭력적이거나 독단적이거나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를 준비했지만, 동시에 그들(자본가 계급)에 대해 계속 공부했다.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들만이 실제 경험에서 그들(자본가 계급)을 배워 왔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자본가 계급에 맞서 싸울 준비가 돼 있었고, 또 기꺼이 싸우려 했다. 하지만 다른 계급들의 존재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격렬한 대립에서 어느 쪽에 설 것인지를 요구했을 뿐이다.
그들(노동자들)은 우리(미국)의 정치 제도가 러시아의 정치 제도보다 낫다는 데 모두 동의했지만, 한 독재자를 자본가 계급이라는 또 다른 독재자로 바꾸는 (미국식)정치 제도를 위해 조바심내지는 않았다.

러시아 노동자들이 수백 명씩 사살되거나 처형되고, 감옥에 수천 명씩 투옥되고 북극으로 유배된 것은, 미국 노동자들이 금광에서 누리는 법적 권리, 그 애매모한 권리 정도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3) 10월 혁명의 시작

10월 10일에 리가 만에서는 독일 함대와 해전이 벌어졌다.
러시아 발트 함대 내에서는 혁명적 기운의 병사위원회활동이 왕성했다.

임시정부는 페드로그라드가 위험하다는 핑계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웠다. 군수 공장을 러시아 전역으로 흩어 놓은 후에, 정부는 모스크바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볼쉐비키는 즉시, 정부가 혁명을 약화시키기 위해 리가에 이어 페드로그라드까지 독일군에게 팔아 넘기려한다고 비난했다.

혁명적 기운의 페트로그라드를 버릴것인가?

반면 부르주아 언론들은 환호했다. 심지어 카데츠의 우파 지도자인 로쟌코는 “페드로그라드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한다면 그것은 축복받을 일이고, 소비에트도 파괴되고 혁명적 발트 함대도 제거될 것”이라고 했다.

“페드로그라드를 잃는다면 중앙 혁명 조직이 파괴될 것이라고 그들은 두려워한다. 이에 대해 나는, 모든 혁명 조직이 파괴된다면 오히려 기뻐할 일이라고 대답한다. 그 조직들이 러시아에 가져오는 것은 재앙뿐이기 때문이다. [독일군이] 페드로그라드를 점령하면 발트 함대도 파괴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러울 것은 전혀 없다. 대부분의 전함들은 이미 타락했기 때문이다.”

대중의 비난이 쏟아지면서 이동 계획은 철회됐다.
한편

[전국 소비에트 대회]를 개최하는 문제가 온통 러시아를 뒤덮고 있었다.

임시정부뿐 아니라 '온건'사회주의자들, 중앙군대위원회와 중앙해군위원회, 일부 노동조합의 중앙위원회, 농민 소비에트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체이카 스스로 대회를 저지하기 위해 적극 노력했다. 하지만 시위는 이어졌다.

4) 10월17일 페드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밤샘회의

10월 15일 여기저기서 무언가 일어났다.

처음에 그것은 명확하지 않았다.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로”라는 구호를 포기해야한다면 봉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비에트는 열렸다.

소비에트에는 온갖 사람들이 발언했고, 험악하고 진지했다. 한 농민은 케렌스키가 지주들의 방패일 뿐이므로 제헌의회를 파괴하려한다고 주장했고, 공장 기술자는 공장주들이 일부러 공장을 폐쇄해서 우리를 굶게해서 몰아내려 한다고 분노했다. 군인들도 볼쉐비키를 지지했다.

전선에서 돌아온 군인 볼쉐비키의 발언

한 병사도 입을 열었다."동지들! 나는 사람들이 자기 무덤을 파고 그것을 참호라고 부르는 곳에서 여러분에게 드리는 인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가 일어서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7월의 전투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그러나 죽은 자들 속에서 살아 돌아온 츄드노프스키였다.

"병사들 대부분은 이제 더는 장교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군대위원회 조차도 소비에트 대회의 소집을 거부해서 우리의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병사들 대다수는 제헌의회가 예정대로 열리기를 원합니다. 의회를 연기하려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이는 관념적인 저주로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군대는 총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5군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헌의회 관련 선거 운동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 장교들은, 특히 멘셰비키들과 사회혁명당원들은 볼쉐비키를 계획적으로 약화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참호 속에서 볼쉐비키 신문은 돌려 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대변인이 체포되기도 했구요."

오보론치 멘셰비키의 일원이자 비테베스크 소비에트의 대표인 장교의 발언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정부가 아니라 전쟁입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전에 우선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야유를 보내거나 혹은 비꼬듯이 환호했다. " 볼쉐비키 선동가들은 그야말로 선동가에 불과합니다!"좌중은 웃음바다가 됐다." 우리가 전쟁 동안만 계급투쟁을 잊을 수 있도록 해 주집시오." 그러나 연설을 계속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 너희가 아닌 우리가 영영 잊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전쟁'은 전 역사에서 항상 '국가권력의 강화'에 기여했지만 이 때, 러시아 노동자들에게는 창피만 당했다.

너나 가서 실껏 싸우다 죽어라..ㅋㅋㅋ

10월 혁명의 진행과 자세한 혁명의 분위기는 다음 포스팅에 ㅎㅎㅎ

"농지는 농민에게 공장은 노동자에게!" 이 구호가 정말 얼마나 가능할까?

------고위 관리들과 장교들, 부자들과, 존경받는 귀족들,  지역유지들의 반대를 어떻게?
  1. 10월 혁명의 증거물
  2. 프랑스 혁명과 볼쉐비키 혁명의 비교
  3. 혁명기 러시아의 경제적 계층구조
  4. 혁명기 러시아의 기업가들
  5. 당시 러시아 정당과 정치단체들
  6. 볼쉐비키 혁명의 원인
  1. 피의 일요일
  2. 1917년 3월 그레고리력으로 2월혁명
    혁명, 페드로그라드 시위
  3. 10월 혁명의 시작
  4. 10월17일 페드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밤샘회의
  1. 10월 혁명의 진행
  1. 페드로그라드 수비대
    2)제 2차 전국 소비에트 대회
  2. 노동자 . 병사 . 농민들에게
  1. 내전
  1. 레닌과 볼쉐비키의 입장
  2. 10/27 혁명의 본 모습
  3. 민주적 혁명과 부르주아 반혁명세력
  4. 혁명군대의 민주화
  1. 권력획득
  1. 혁명후의 혼란
  2. 소비에트 정부의 완성
  1. 혁명 후 [사회주의100년]
    □참고문헌

서평소개


“꿈을 찾지 마라!” 너를 착취하는 보스의 배후는 너 자신이다.[ 피로사회/우울사회] 서평

[자본주의역사바로알기] 서평 : 자본은 어디서? 출생과 성장/불황이 널뛰는 동안 민주주의가 파괴된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2] 자본가들 그 많은 돈에는 피가 가득하다

공황과 전쟁의 세계사 [네루의 세계사 편력] [사회주의 100년]

북한의 급 평화공세- 왜일까? 지난해 온동네 얻어터지면서도 부득 쏘아대던 것도 이상했는데,,,,

[역설과 반전의 대륙] 총은 들었지만 권력은 줘도 안 갖는다-SNS게릴라/신자유 빼고 되는 건 다하는 사회주의자들 차베스, 룰라/ 총을 든 여자들 사제들, 가난한 대통령. 감동의 남미

[늙어감에 대하여-저항과 체념사이에서]장 아메리. [죽음이란 무엇인가]-셀리게이건

독일과 일본 제국이 거의 성공할 뻔 했었다./ 평화는 여자들 덕분에 [문명과 전쟁5]

" 희생이 사랑이라고요? " [ 깨어나십시오!] 앤소니 드 멜로. 서평

"그에게 사랑받는 특별한 존재이고 싶어요?" " 어리석네요ㅠㅠ! " 앤소니 드 멜로 [서평]

커퍼cupper가 알려주는 커피의 맛? 쓴 커피는 버려라!

[문명과 전쟁4] 중세이후,역사는 말(馬 )의 기록. 기마민족의 얘 업은 아낙네가 보병들 보다 빠르다?

[문명과 전쟁] 서평3. 숫자싸움: '시민'의 등장과 일부 족장이 제국을 이루기까지

[문명과 전쟁] 서평 2, 농업혁명 VS 목축부족

[문명과 전쟁] 서평 1, 농경이전 수렵채집인은 평화로왔나?

[소문의 벽],[광장],[한강],[전환시대의 논리]- 소설가와 시대정신

[청원] 국립공원에 그냥 들어 Gazua!!!

서양 성당건축의 이해. 스페인여행과 수채풍경화

중국에서 일어날 뻔한 산업혁명? [노동 성 권력],[총균쇠], [전쟁의 세계사] [문명과 전쟁] 비교분석

[노동,성,권력],서평. 인류의 여성혐오사 , SeX 와 혈연의 문제

[ 피로사회],[ 우울사회]. “꿈을 찾지 마라!” 너를 착취하는 보스의 배후는 너 자신의 긍정성이다

[불평등의 대가] “ 미국인 몇이 전 세계 저소득층을 쓸어버렸다.”

시오노 나나미 비판,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n [총균쇠], [문화와 전쟁]

자본의 탐욕과 노동자의 소외- "경제는 이론이 아니다. ‘의지와 결정’의 문제다."- 장하준 [경제학 강의]

탐욕스런 가해자의 기만적 경제이론과 그 피해자들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인구수 비례 세계 최강 올림픽 메달 국가는? [사회주의 100년]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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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장 취약한 분야의 독서가 바로 사회, 역사 분야입니다. 아니 읽기는 해도 글로 풀어내지 못하는... 길고 어려운 글(ㅠ) 한자 한자 열심히 읽었습니다. 리스팀 하고 왔다갔다 하며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네 감사해요
나름 공들인 포스팅이다보니 끝까지 읽어주시는 분들이 제일 고맙습니다
역사란 알아갈수록 미래의 실수를 예방하는 필수분야라 믿어요

존 리드. 이 얼마만에 접하는 이름인지요...

70년 전후에 운동 좀 하셨군요 ㅎㅎㅎ

70년 전후면 제 나이가...ㅎㅎㅎ

아 실수 87년 얘기 한다는 것이 ㅎㅎ
아니면 조숙하셨거나 ㅎㅎㅎ
90년대도 존 리드가 읽히진 않았을것 같은데요 ㅎㅎ

네... 이를테면 '끝물'이었던 셈이네요. ㅎㅎ

raah님의 책 취향은 포스팅만 봐도 여실히 들어나는군요 ^^ 라님 포스팅보면 중고등학생때로 돌아가 다시 수업듣는기분입니다 ^^

재미없고 보기 어렵다는 말씀이시죠 ㅎㅎㅎㅎ 아이 큰일 났네 이거....ㅋㅋ
접수합니다. 낼부턴 조금씩 ...조금씩 ㅎㅎㅎ

조금 지루하지만 충분히 유익하게 읽었습니다. 프랑스혁명도 단순하게 알고 있었는데 뒤에 부자놈들이 있었군요. 글을 읽으면서 우리 촛불집회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네요. 잘 읽고 갑니다!

지루한 것은 빠ㄹ리 고쳐야하는데....요약을 잘 못하네요 ㅎㅎㅎ

혁명은 실패가 운명이다
저는 늘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운명이 실패가 다만 다음 혁명의 성공 가능성을 조금 올려주는 것이죠
그것이 인간의 역사이고 또 운명입니다.^^

세계사 잘 모르는 사람이라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서 ㄷㄷ
그래도 일부는 기억 남겠네요 ㅎ

너무 양이 많았나보군요 죄송해요......

아뇨. 많은 정보를 배워서 좋았다는거에요.
제 기억력의 한계가 있을 뿐인거죠 ㅎㅎ

볼쉐비키 혁명 기억하면서 다음에서 또 뵐께요.ㅎㅎ
역사 잼병인데 이렇게라도 자극 받을 수 있어 좋습니다.
어렵지만 읽다 보면 이해 하는 날이 올 줄 믿습니다.^ㅡ^

어릴땐 죽어라고 역사책들 들여다봤는데, 지금은 제일로 어려운게 바로 역사책이 되었습니다. 라님 덕분에 추억도 돋고, 공부도 합니다. ㅎㅎㅎㅎ

성공한 혁명은 존재하는가... 에 대한 의문이 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류의 역사를 발전시켜온 것도 혁명이라는 점을 부인 할 수 없으니...
누군가의 노력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역사안에 살고 있음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네요 ^^
첨에 휴대폰으로 봤는데 나중에 컴퓨터로 봐야겠다 생각하고 뒀다가 잊어버려 이제야 봅니다 ㅋ

소련이라는존재가 유럽에는 타산지석이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독재를 정당화하고강화하는 수단만 된것같아
많이 아쉽죠 국민이 더 많이 알아야 하는데 싶어요ㅎ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10월 혁명의 자세한 내용도 기대됩니다.
어차피 이어서 연재하시는 거니 1 포스팅 분량을 줄이고 여러 번으로 나눠 올려 주시면 저처럼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1번에 1917년이 1971년으로 오타 났네요~

앗 감사해요 수정해야겠네요 ㅎㅎ 정말 짧게해야지 하다가도 내용을 더 더더 ㅋㅋㅠ

짧게 요청은 모바일 특성 때문이죠^^
저는 오히려 방대한 내용을 알고 계시고 풀어낼 능력을 갖고 계셔서 존경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