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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kr4 days ago

내 몸과 마음은 현실과 연동되어 있다. 세상이 나를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니나, 어떤 부분을 나를 위해 만들어지기도 했다. 중요하게 여기고 내가 사인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분명 날 향해 무언가 말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세계가 어떠한 흐름으로 한 방향으로 밀릴 때, 거대한 에너지가 수 없이 분산되어 각자에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조금은 얹어지는 게 아닌가하고 말이다. 그렇게 사건들이 생기고 감정들이 생기고 이야기가 생기는 게 아닌가하고.

요 며칠 매트릭스를 다시봤다. 공각기동대는 1편만 보았는데 요런시점님의 공각기동대 리뷰를 보았다. 기계와 인간이 다르지 않다는 말. 기계와 인간이 다르지 않다는 말엔 직관적으로 거부감이 생기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고 아마도 매트릭스 2부와 3부, 공각기동대 2부의 불편함이나 재미없음이 거기서 기인한 게 아닐까 그는 말했다. 과거 유물론이 기계나 물질을 한 단계 아래로 격하시켰다면 신유물론의 물질은 정신보다 열등하거나 우열이 있지 않다고 그는 설명했다.

공각기동대 감독님이 말한 어쩌면 더 순수하게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을 제외한 무생물과 동물, 신일 것이다. 인간은 애매하게 그 중간에 끼여있다. 그러나 그 중간에 끼여있다는 말은 신처럼 확장하고 순수한 기쁨을 누릴 수도 있단 말이다. 그것이 나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 점에서 인간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들으면서 나는 기계와 인간이 다른 게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그 점이 조금도 실망스럽지 않다. 워쇼스키 자매의 말처럼 그런다고 인간적인 가치가 무의미하다거나 중요하지 않게 되지는 않으니까. 모든 게 예정되어 있거나 자유의지가 허상이라도, 기계처럼 메커니즘으로 인해 선택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사랑의 가치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예정된 선택이라도 자유롭다는 느낌 또한 소중하다. 그게 다 정해져 있다고 해도 아무 차이가 없다. 본인은 선택할 때 그 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정된 길을 따라 산다고 해도 어떤 마음으로 살지는 고를 수 있다. 어쩌면 그게 인간이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걸 바꾼다. 같은 내용이라고 해도 완전히 다른 이야기와 다른 느낌을 주고 다른 존재가 되게 한다.

그러니 Amor fati다. 운명을 사랑한다. 산책길에서 청솔모가 유려하게 또 제법 천천히 나무 위를 뛰어다니는 걸 봤다. 하늘을 나는 것처럼 경쾌했다. 아무런 위대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도, 파라다이스에 도착해 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