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우는 처세 - 하륜이 탐욕스러웠던 이유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 높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임원 아저씨들이 그렇게 무능해보일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직할 때 다시 보니 그렇게 멍청한 인간들은 아니더군요, 그냥 살아남고 싶어서 바보 흉내를 내는 능구렁이들이었죠. 30년이 넘는 조직생활에서 살아남아 임원이 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의 영리함이라는게 보통 자신의 생존을 위한 처세술로 이어지지 조직의 발전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일단 그건 그런 조직문화를 만든 리더의 문제이지, 각자도생하기 위해 합리적 선택을 하고 있는 개인들을 탓할 수는 없겠죠.
하륜은 태종 이방원을 도와 왕자의 난을 일으킨, 즉 태종을 왕으로 만든 일등 공신입니다. 술에 취한 척 일부러 태종의 옷에 술을 쏟았고 불쾌해하며 화장실에 이를 닦으러 가는 이방원을 따라가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책략을 진언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를 탐욕스럽지만 유능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태종이 실시했던 관제 개혁, 군제 개혁, 호패법 시행, 조세제도 정비 등은 모두 하륜이 계획을 입안하고 집행했으며 신문고 설치 역시도 그의 작품입니다. 경국대전의 원안이 되는 경제육전과 같은 법전부터, 고려사와 동국사략 등의 역사서 편찬 역시 그가 감독했습니다. 스마트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반면 사생활에는 잡음이 많았다고 합니다.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도성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어 불편하다는 이유로 능 백 보까지는 거주를 허락해달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태종은 이를 받아들였는데, 집을 지으러 간 백성들이 본 것은 자기 사위들까지 총 동원해서 노른자위 땅들 싹 점거한 하륜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친인척들과 함께 거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소중한 양식 터전이던 갯벌을 무단 간척을 하고는 그 땅을 사유화했을 뿐 아니라, 대놓고 매관매직을 해 실무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앉혀 태종에게 질책을 받은 사건도 있습니다. 여색을 밝혀서 첩도 많았을 뿐 아니라 술에 취하면 유학자답지 않은 격 떨어지는 말도 많이 했다는군요.
한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이런 하륜을, 골치아픈 책임은 태종에게 맡겨두고 행복한 2인자로서 부귀영화를 즐긴 인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분은 이 프로그램을 보시더니, 사회 경험 없이 책만 읽은 백면서생들의 헛소리라고 혹독히 비판하며 아래와 같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스의 비밀을 많이 알고 초기 정권 출범에 지분이 많으며, 뛰어난 지략이 있어서 정계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참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스의 손에 제거된다. 그런 뛰어난 부하는 보스에게 부담이 되기 때문이지!
게다가 태종 이방원은 의심도 많았고 왕권을 위해서는 누구든 가차 없이 처단했던 사람이야. 왕위에 오르기 위해 형제를 죽였고 이를 지키기 위해 공신들은 물론 처남 4형제와 사돈까지 죽였다.
만약 하륜이 저렇게 물질이나 여색에 집착하며 자기 명성을 스스로 깎아먹지 않고, 유능한 재상으로 평판을 유지하며 자기 사람을 늘려갔으면 이방원이 하륜을 어떻게 생각했을 것 같냐?
하륜은 정도전을 위시해 여말선초의 유학자들이 권력과 관계되어 어떤 식으로든 제 명에 못 죽는 사이 두 왕조의, 아홉 임금 시대를 살고, 일곱 임금을 섬기며 천수를 누렸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영리한 사람인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적성에도 안 맞는 직장 생활을 하며 관찰한 바에 의하면, 상사가 가장 싫어하는 부하는 무능하거나 게으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그냥 인사고과를 긁어서 다른 부서로 보내버리면 됩니다. 상사가 가장 싫어하는 부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 어떻게 행동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 인자요산 지자요수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설파하며 어떤 인물이 되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추후 더 자세히 포스팅하겠습니다만 답은 단순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물 같이 유연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산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말인 즉슨 실제로는 변화무쌍한 존재라고 해도 남이 보았을 때는 예측 가능하고 통제 범위 내에 있는 것으로 보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특히나 자기가 을의 입장, 아랫 사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지근거리에 있는 자기 부하의 꿍꿍이를 읽기 위해 머리 싸매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방원 입장에서는 하륜이 얼마나 쉬워 보였겠습니까? 아 저 놈은 능력은 있지만 물질이나 여자를 밝히는 놈이니 적당히 이런 것들만 쥐어주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구나! 이렇게 생각했겠죠. 실제로 이방원은 하륜이 한 잘잘못을 따지거나 벌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리를 위협하기는 커녕, 오히려 안심을 시키니까요. 때로는 이처럼 상사가 자신을 좀 우습게 보게 만드는 것도 필요합니다.
조직에서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것은 인간의 심리를 움직이는 가장 스릴 넘치는 게임은 아닐까 생각이 되네요. 저는 애초에 소질이 없어 때 되면 알아서 퇴사할 생각입니다만 잘 하고 계신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Cheer Up!
지금의 불편하고 안타까운 모습들이 과거에도 이렇게 있었다니 역사는 돌고 도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입고 먹고 자는 곳이 바뀌었을 뿐 사람들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나보네요.
그래도 요즘 시대에 사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조직생활을 굳이 안하거나 하더라도 그런 양반들이 없는 곳에서 할 수 있는 환경들이 조성되고 있으니 이보다 기쁜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admljy19님께서 이를 이미 잘 알고 계시니 곧 퇴사한다고 하시는 거겠지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저도 나갑니다. 나가서 뵙겠습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먹고 자는 곳이 바뀌었을 뿐 사람 간의 관계를 관통하는 그 이치는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옛날처럼 한 자리를 해먹으면 그게 절대적인 숭배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고 먹고 사는데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라면 자기 좋은대로 하는게 맞는거겠죠. 곧 퇴사는 아닙니다 ㅋㅋㅋㅋㅋ 다만 자기가 뭐가 맞고 뭐가 안 맞는지를 명확히 알고 안 맞는거를 안 했을 때에 대한 대안도 있다면 뭐든 시간의 문제일 뿐이겠죠
응원합니다 ㅎㅎ 힘내시길...
인생은 하륜처럼이라 흔히 말하지만 그렇게 살아내기가 쉽게 얘기할만큼 쉽지 않은 일임을 다시 깨닫게 되네요.
인생은 하륜처럼 ㅋㅋ 저도 그 말 들었습니다... 당연히 쉬운게 아니겠죠 ^^;
처세술의 달인을 생각하니까 하륜말고도 삼국지의 가후가 생각나네요 ㅎㅎ 처세술에 능통한 사람들은 다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가후가 한 수 위인 것 같기도 합니다 ㅋㅋ 여러분들이 이 댓글을 달아주셔서 가후에 대해 다시 읽고 있는데 정말 대단하네요 ㅋㅋ
천하제패 후, 유방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본인의 명성을 스스로 해쳤던 소하와 같은 인물이군요~~~^^ 하륜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옛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면 세상은 또 전혀 달라지지 않았더군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생 사는 방법이 다양한 것 같아요 ㅎㅎ 하륜의 방법 또한
생각해보면 대단한 것 같구요. 흥미로운 글 감사합니다.
ㅎㅎ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새해부터 공감하지 아니할 수 없는 조직생활에 대한 통찰이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즈앗!!! ^^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가즈앗~!! ㅋㅋㅋ
늘 공감이 가는 이야기를 풍부하게 잘 써주십니다~ 솔직히 글 쓰는 일로 전업하셔도 될 듯.. ㅋ
가즈아~
업보팅하고 갑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인간은 자기 보호 본능을 버리지 않죠. 그중 하나가 바로 처세술이고 큰 조직일 수록 그 보호본능으로 인해 많은 제3자가 피해를 보게 되죠.
그게 역설입니다. 저 하륜의 처세로 인해 죄 없는 백성들이 간척공사에 동원되었으니... 전 직장도 머리 좋은 임원들의 생존본능이 회사 영업이익을 갉아먹었죠
제가 읽은 어떤 소설에서는 삼국지의 가후도 이런 평가를 받기도 하는 것 같던데요 ㅋㅋㅋ
비슷합니다 ㅎㅎ 아니 가후가 한 수 위일지도 모르겠네요. 항장 출신, 그것도 주군의 아들을 죽인 계책을 낸 항장으로 출세가 가능했다는게 참 후덜덜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