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파문 그러니까 파혼
"운명은 바꿀 수 없어 운명인 거예요. 바꿀 수 있다면 더 이상 운명이 아닌 거지요."
"그렇다면 제가 그 사람과 결혼한 건 운명이란 말씀이신 거죠?"
"아니요. 그건 선택이죠.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운명은 돌이킬 수 없는 거랍니다. 브라질 처녀."
할머니는 계속 브라질 처녀라고 불렀다. 이미 결혼한 새댁을 부르는 호칭이라면 차라리 브라질댁이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기어코 브라질 처녀라고 불렀다.
"할머니, 그런데 처녀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말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 맞아요. 브라질 처녀."
"그런데 전 결혼을 했는데요."
"아, 그것도 맞지요. 하지만 브라질 처녀는 자신을 아직 처녀로 여기고 있는걸요."
브라질 처녀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낯선 타국의 문화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지만, 할머니의 말씀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특히 운명과 카르마와 같은 동양적 세계는.
"그게 카르마 때문인 거예요. 그러니까 남편과 만났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카르마가 운명은 아니에요. 선택의 결과일 뿐이죠."
"제가 다른 선택을 하면 운명이 달라지나요?"
"브라질 처녀, 내 말이 이해하기 어렵죠? 운명은 달라지지 않는다니까요. 선택이 달라지는 거죠."
"아, 그런가요?"
"그러니까 브라질 처녀, 처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결과가 달라지겠죠? 하지만 운명은 달라지지 않아요."
그때 사우나 천장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톡하고 할머니와 브라질 처녀가 몸을 담그고 있는 온탕의 수면 위로 떨어져 내렸다. 동그랗게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번져나간 파장이 할머니와 브라질 처녀의 가슴께까지 밀려왔다. 그때 브라질 처녀의 머리에 불현듯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할머니, 그렇다면 저보고 남편을 죽이라는 말씀이에요?"
브라질 처녀의 뜬금없는 말에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사우나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물방울들이 열심히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건 선택이죠. 나는 선택에 대해 말하는 거예요. 물론 살고 죽는 건 운명이겠죠? 브라질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살고 죽는 건 운명이라고?"
브라질 처녀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브라질 사람들이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과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니까, 브라질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결과는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을 죽이고 싶어요?"
"아니요. 모르겠어요. 없는데 어떻게 죽여요."
"그래서 떠난 거예요. 남편이"
"네?"
"처녀 손에 죽을 까 봐, 떠난 거라구요."
브라질 처녀의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할머니가 던진 말이 처녀의 마음에 닿자 붉은 파문을 일었다. 처녀는 자신의 마음이 할머니가 일으킨 파문에 휩쓸리는 것을 느꼈다. 파문은 점점 커져 쓰나미가 되었다. 그대로 쓸려 떠내려 가 버릴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자칫 이대로 정신줄을 놓게 된다면 탕 속에서 실신을 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아무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는 왜 왁싱을 하셨어요?"
"네? 뭐요? 왁싱? 푸하하하"
할머니는 탕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어젖혔다. 브라질 처녀가 이 나라에 와서 느낀 가장 큰 문화적 충격은, 이 나라 여자들은 아무도 왁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브라질 여자들은 예외 없이 모두 왁싱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예의라고 생각한다. 또한 왁싱을 했기 때문에 사우나나 탈의실에서도 같은 여자들끼리 벗은 몸을 보여주지 않는다. 벌거벗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라질 처녀는 이 나라의 사우나와 탈의실에서 모두 훌러덩 벗고 있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벌거벗은 게 아니었다.
브라질 처녀는 궁금했다. 왜 모두 왁싱을 하지 않는지 남편에게 물었다. 그러자 남편은 그게 이 나라의 문화라고 답했다. 이 나라의 여자들은 아무도 왁싱을 하지 않는 게 문화이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줄 수 있다고. 남편은 또한 그래서 그녀를 선택한 거라고 덧붙였다. 브라질 여자들은 왁싱을 하니까. 브라질 처녀는 남편의 말에 갸우뚱했다. 문화인 건 이해하겠지만 그래서 나를 선택한 거라는 말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남편은 사라졌다. 욕실에는 면도기와 잘린 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부끄러운 얘긴데, 죽은 남편은 늘 정성스럽게 왁싱을 해 주었어요. 처녀도 이제 알겠지만, 이 나라 여자들은 왁싱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남편은 깨끗하게 밀린 그곳이 보기 좋다며 늘 자 손으로 왁싱을 해 주었어요. 처음에는 부끄럽고 민망해서 싫다고 거절을 했는데, 남편이 한사코 청을 해서 어쩔 수 없이 한두 번 하다 보니... 음, 뭐 좋더라구요. 다시 소녀가 된 듯하다고 할까? 아, 그렇다고 남편이 뭐 변태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우리는 매우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유지했어요. 갈수록 횟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그게 오히려 정상이죠. 후후.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자기도 왁싱을 해달라는 거예요. 어떤 기분인지 느껴보고 싶다면서. 나는 남사시럽다며 계속 거절을 했죠. 그러다 어느 날 밤인가, 자려고 누웠는데 도통 잠이 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화장실이나 다녀오자고 일어나 욕실로 가서 불을 켰는데 면도기가 딱하고 눈에 들어오지 않겠어요. 왜 그랬을까? 암튼 면도기를 보자 갑자기 호기심이 들었어요. 남자가 왁싱을 하면 어떤 모습일까 하고. 하하 요즘 젊은 사람들이야 남사시런 사진이나 영상 보는 게 흔하다지만 우리때야 어디서 그런 걸 접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말이에요. 그러니까 브라질 처녀, 내가 어떻게 했을거 같아요?"
"네? 어떻게 하셨는데요? 왁싱을 해주셨어요?"
할머니는 대답은 하지 않고 빙그레 웃더니 몸을 일으켜 탕 중앙으로 물을 가르며 걸어 나갔다. 그리고는 처녀를 향해 돌아서더니 갑자기 손뼉으로 리듬을 맞추며 노래도 주문도 아닌 신비로운 음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탁탁 탁타탁! 짝짝! 하!
탁탁 탁타탁! 짝짝! 후하!
탁탁 탁타탁! 짝짝! 호후하!
리듬이 계속되자 사우나 천장의 물방울들이 서로 합쳐지더니 거대한 물폭탄 크기로 불어났다. 탕 중앙으로 모여든 물방울들은 할머니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수정구슬 처럼 불어나 당장이라도 떨어져 내릴 듯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브라질 처녀는 물폭탄이 저대로 떨어져 내렸다간 할머니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물폭탄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기 직전이라는 걸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를 이대로 두면 큰일 나겠다 싶어, 할머니를 잡아당기려고 브라질 처녀가 몸을 일으킨 순간, 쿵! 하고 물폭탄이 떨어져 내렸다. 처녀가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탕 벽에 있던 폭포수 버튼을 눌러 버린 것이다.
"브라질 처녀,"
"네 할머니."
"이게 카르마예요."
"그럼, 저는 어떻게 되죠? 남편은요?"
"우리 남편은 어떻게 됐겠수?"
"글쎄요..."
"아직도 남편을 죽이고 싶어요?"
"모르겠어요."
"아직도 자신이 처녀인 거 같아요?"
"이미 잘라버린 털을 다시 붙일 수는 없잖아요."
"털이야 다시 자라나죠. 그게 운명이랍니다. 인간들이 자꾸 깎아대니까 카르마고."
브라질 처녀는 이제 알겠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파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니 파혼을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처녀는 결혼한 적이 없으니까. 혼인은 성인들 간의 약속이므로, 이혼이 아닌 파혼을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혼은 쌍방간의 합의가 있어야 하지만, 파혼은 한쪽의 선언으로도 성립되는 것이니.
그 후, 천장 누수를 해결하지 못한 사우나는 폐업을 했고, 그 자리에는 새로 왁싱샵이 들어섰다. 브라질 처녀는 왁싱샵에 취직을 했다. 사장은 그녀의 브라질 국적을 마음에 들어 했다. 사장은 처녀에게 그냥 브라질에서 하던 대로 하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처녀는 자신의 업무와 보수가 만족스러웠다. 브라질 출신인 것이 이렇게 활용될 줄 몰랐다며 고국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왁싱샵으로 할머니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인생이란 물방울과 같아서 떠오르고 떨어져 내릴 때마다 파문을 일으키죠. 탄생과 죽음이 모두 파문인 거예요. 운명이고. 또한 카르마죠. 남편이 나의 삶에 파문을 일으켰어요. 나는 가만히 있다 떠밀려 가지 않고 파문을 일으켜 대응했죠. 카르마는 주고받는 거랍니다. 그러니 마음 놓고 파문을 일으켜요. 운명은 어차피 바꿀 수가 없으니까. 브라질은 남반구라 그런지 참 따뜻하군요. 나는 여기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달고나를 팔고 있어요. 다들 따봉을 외치며 무척 좋아한답니다. 인생은 달콤하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P.S.
아, 그런데 성모 마리아도 왁싱을 했을까요? 동정녀라면서요?
[위즈덤 레이스 + Movie100] 094. 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