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1] HAEUNDAE 해운대, 자아의 탄생
Haeundae, Busan,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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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첫 도시는 지금 머물고 있으며, 현재까지 살아봤던 도시 중 가장 좋아하는 곳을 골라야겠다. 바다를 품은 나의 동네, 해운대. 이십대 때는 이 도시가 조금 슬프게 느껴졌다. 마음에 가득한 해무. 어디로 나아가야할지 몰랐다. 모든 게 두려웠고 자신이 없었다. 밖에 나가면 연인들이 풍겨대는 로맨스와 젊은 녀석들의 과한 활기를 마주하기가 곤란했다. (그때는 본인도 '젊은 녀석'이었으면서.) 게다가 매일 같이 쏟아지는 여행자들의 설렘과 행복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휴, 저 들뜨는 모습들. 지겨웠다. 나는 사람들이 덜 북적이는 영화의 전당이나 고은사진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같은 곳에서 바라는 삶에 대한 갈증을 조금씩 해소할 수 있었다. 내가 어떤 작품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는 게 좋았다.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고, 프랑스에서 그가 아티스트 토크를 하러 왔을 때 직접 만나 용기 내어 질문도 하고 싸인도 받았다. 이런 장소들 덕분에 도시에 애정이 생겼다. 그냥 바다만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십대의 절반은 해운대가 아닌 다른 도시들에서 살았지만, 스물 아홉 때 다시 해운대로 완전히 돌아왔다. 일을 시작하고, 틈새에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넣으면서 시간을 쌓아갔다.
해무가 마음에서 걷히고 눈이 맑아진 건 서른이 훨씬 지나서였다. '어떻게 살까'라는 질문에 잠겼던 시절 뒤로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경험적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의 절망과 우울은, 아직 아무 것도 확신할 수가 없다는 감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치 실크스크린처럼, 세상과의 경험치가 한 겹 한 겹 칠해질수록 내가 바라는 모습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 삶에 필요한 요소를 거꾸로 생각해보니, 내가 살고 있던 이 도시가 이미 모든 걸 가지고 있었다. 그때 느낀 환한 깨달음은 감사한 마음으로 번져갔고, 이 도시에서 평생 살아도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연인을 처음 만난 도시도 해운대. 카메라를 들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험 같은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해무가 걷힌 도시는 선명하게 빛났다.
아래 조건만 어떻게 잘 해결 된다면, 사실 세상 어느 곳에서 살아도 상관이 없다.
- 대중교통 없이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반경 5km 내외)에 필요한 게 다 있는 곳
- 필요한 것: 공공도서관, 미술관, 다양한 카페나 바, 가족/친구, 운동기구(실내외), 5km 이상의 충분한 산책로, 병원
- 인공 자연 말고 진짜 자연이 가까이에
- 글을 쓰고 일을 할 수 있는 쾌적한 방
여러 곳을 경험할수록 이게 다 충족될 수 있는 곳이 드물었다. 그래서 이 도시에 더욱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지만, 곧 여길 떠나서 새로운 곳으로 갈 예정이다. 도시에 애정이 생기는 것은 역시 공간과 사람 덕분. 가치관과 취향을 굳혀나가는 귀중한 시기에 자기 모양새에 맞는 삶의 공간은 그 자체로 축복이 된다. 새로이 나아가는 도시에서도 공간과 사람으로 그 시간을 더욱 깊이 살아낼 수 있었으면 한다.
![87D995C8-FDDE-448C-BEAC-93E05AA65498.jpeg](https://steemitimages.com/640x0/https://cdn.steemitimages.com/DQmZPExDwUYNxaUGnXPgTBLhxtRRbyWLbXtzt4kN6mP6frp/87D995C8-FDDE-448C-BEAC-93E05AA65498.jpeg)
- 영화의 전당 라이브러리 (마음껏 누리는 영화와 책의 천국)
- 고은사진미술관 (사진책 열람가능, 좋은 전시를 쾌적하게)
- 랄프 깁슨 사진미술관 (입장료 있음,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를 언제나 만날 수 있음)
- 홈 비스트로 (비건 넘버원 카페 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살롱)
- 카페 타카카 (해운대 안에서 만나는 뉴질랜드, 서퍼들의 작은 쉼터처럼 한없이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카페 바)
- 해운대 까사부사노 (오전 8시 30분 오픈의 기적, 커피와 술 모두 가능, 독서 글쓰기 업무 모두 탁월)
- 달맞이 추리문학관 (추리소설가 김성종 작가의 방대한 서재, 한국에서 개인이 지은 공간에 이런 바이브가 가능할 줄 몰랐다. 1층은 북카페, 2-3층 꼭 둘러보기!)
- 청사포-동백섬-해운대해수욕장-마린시티 (산책하기 가장 좋은 장소, 가끔 벤치에서 책 읽고 글을 쓰기도)
- 요트경기장 (예전에 친한 언니의 배를 관리해준 적이 있어 오랫동안 바다 위에 뜬 나만의 방이 되어주었다. 탁 트인 광장과 요트계류장의 풍경이 아름다운 곳)
채린님의 해운대 잘 보았어요. 소개해주신 곳들 다 가보고 싶어요 😝
전 자기소개할 때 내면탐험가라고 소개하곤 하는데, 일기탐험가🩵란 단어에 애정을 듬뿍 느끼고 가요
왠지 스텔라님 "추리문학관"을 참 좋아하실 것 같아요! 👀 이렇게 자연스럽게 빈티지가 된 진짜 개인 서재 공간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더라구요! :) 홀딱 반해버렸답니다.
우리, 같은 탐험가 카테고리에서 살고 있군요! 😋 너무 좋습니당 :) 마음껏 더 경험해보며 살아요~!
해운대가 나오니 너무 반갑네요 코로나 시절 해운대에 살았어서 매일 동백섬을 산책했거든요! 파도소리를 들으면 누군가 속삭이듯 영감이 샘솟고 신비체험도 있었는데 채린님도 의식과 경험이 더욱 확장될 것 같아요🪽
와, 그렇다면 보얀님과 이미 스쳐지나간 사이였을수도 있겠네요! 😲 그 갑갑했던 시절, 동백섬이 정말 숨통 트여주는 장소였지요 ㅠㅠ 같은 바다 기운을 얻은 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