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3] MILAN 나의 소중한 공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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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an, Italy
토요일 아침, 남아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정말이지 너무나 격하게 일을 하고 싶지 않은 하루였다. 그래도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임무를 완수했고, 짐을 싸고, 틈틈이 부모님 일도 도와드렸다. 밤 10시, 창밖을 보니 오랜만에 온 도시가 해무로 가득 차 있다. 이런 날 와인 한 잔 하고 가랑비 맞으며 돌아다니면 정말 재밌을 텐데. 연인이나 동네 친구가 곁에 있었다면 우린 곧바로 기나긴 밤 산책을 나섰을 것이다.
밀라노에 도착한 새해 첫날 밤. 현지 호스트가 추천해준 피자집에서 레드와인과 피자를 먹고 가랑비가 내리는 밤거리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3년 6개월을 다닌 회사를 12월 마지막 날을 끝으로 그만두고 거의 바로 떠난 여행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외국에 있는 게 믿기지 않은 상태였다. 휴가를 내는 것이 심리적으로 불편해 그렇게 좋아하던 여행을 오랫동안 누리지 않고 일에 파묻혀 지냈었다. 서울에서의 일이 시작되기 전 나에게 허락한 두 달은 정말 중요했다. 장거리 연애를 시작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 결정을 내리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계속 지낼지, 아니면 또 다른 미지의 도시로 거처를 옮길지 결정을 내릴 뿌리가 되는 시간이었다.
여행의 첫 시작으로, 밀라노에서 머무는 일주일은 그동안 열심히 살았던 나를 위해 '백지장'으로 마련했다. 신경 쓰고 바빴던 모든 것들의 스위치가 꺼지자 몸의 긴장이 풀렸다. 그래서 7일 중 4일은 감기 몸살과 위장 장애, 호르몬 이상으로 끙끙 앓아야 했다. 아니, 왜 이런 귀한 시간을 줘도 누리지 못하는 건지! 억울한 마음이 올라왔지만, 그런 감정도 모두 포함해 현재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7일 동안 아파트를 빌려서 지냈다. 꼭대기였던 5층에서 동네를 가까이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의외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집에 머무는 이른 아침과 밤에 근처 성당에서 울리던 종소리. 습기가 많은 공기 중에 퍼지던 소리가 마음에 평온을 불러왔다. 그래서 종이 울리기 시작하면 창문에 고개를 내밀고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았다. 이렇게 가만한 순간을 꽤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숙소와 가까이 있던 카페 나폴리에서 매일 아침 카푸치노를 마시고, 그날 하루의 긴 산책을 시작했다. 밀라노에서 획득한 나의 기념품은 로컬 음반숍인 세렌딥피티(Serendeepity)에서 발굴한 일 마레 디 프론테(Il Mare di Fronte)의 데뷔 음반 LP이었다. 나중에 음악을 하는 이탈리아 친구에게 물어보니 정말 괜찮은 로컬 아티스트라고 했다. 음악과 사진, 비엔날레 전시로 채워졌던 나의 공백. 여기서 일주일을 보내고 연인은 독일로 돌아가 업무를 시작하고, 나는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는 언니를 만나러 파르마로 갔다.
쉬어가는 구간은 언제나 설레고 좋은 기분을 남긴다. 비록 절반을 아픈 상태로 보냈지만, 무언가가 끝나고 더 이상 부담이 없는 상태에 놓이는 순간은 참으로 달콤하다. 서울에서 일을 시작한 후로 4월부터 7월까지 4개월 동안 번아웃에 시달려야 했으니 이때 겨울에 잠시 누렸던 휴식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실감이 됐다. 요즘 일주일 중 가장 마음이 편한 시간은 월요일 회의가 끝난 저녁이다. 오늘의 작은 공백은 세 번째 도시를 회상하고, 독일어를 공부하는 데 남김 없이 썼다.
성당 종소리 좋아해요. 종소리가 울리면 포탈이 열린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