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2] 삶으로 나아가며 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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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Grenier: Les Iles
<섬>,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6, 36쇄
취향의 채움
좀 더 어렸을 때의 나는 여행을 위해 살았다. 시간이 생기면 적절한 탐험을 위해 환경을 조성했다. 낯선 곳에서 비어 있는 날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은 압도적인 희열을 전해주었다.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텅 빈 시간. 그 안에서 현재와 미래를 지웠다 그리기를 반복했다.
그때 내가 발견한 것은 원하는 삶에 대한 희미한 상이었다. 모든 걸 획득한 인간이 된 듯한 느낌을 어느 한 순간에 느꼈다. 형체가 없어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나의 여행은 그 느낌을 구체화하기 위한 장치였다. 일상에서 터진 물음은 스스로 해답을 찾아간다. 텅 빈 상태에서 나의 욕망은 언제나 미술관이나 박물관, 책방, 카페로 향했다. 그곳 어딘가에 비밀이 있는 듯한 확신이 들었다.
일을 시작하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더욱 곤란해졌다. 게다가 돈을 쓰기 보다는 모으는 것에 더욱 커다란 만족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속에서 무언가 구겨지고 있었고, '여행의 감각'을 찾지 않으면 심각한 상태에 이를 것처럼 위태롭기도 했다. 그래서 일상 안에서 어떻게든 그 감각을 재생해야 했다:
- 퇴근 후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밤 드라이브를 떠나며 현재와 미래를 지우고 그리는 작업을 이어갔다.
- 이 도시에서 찾아갈 수 있는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바싹 마른 우물을 채우기 위해 애를 썼다. 모든 전시가 만족스럽지는 않기 때문에, 갈증 해소 또한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 카페가 어느 정도 '낯선 여행지' 역할을 해주었다. 익숙하지 않은 책상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것은 분명 여행의 감각과 흡사했다.
- 카페가 하드웨어라면, 도서관이나 동네책방, 대형서점은 여행에서의 소프트웨어를 대신했다. 서가를 돌아다니며 필요한 이야기가 담긴 책을 발견할 때는 여행지에서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한 것만큼의 기쁨을 주었다.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마치 위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여 그 악기의 위력을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대로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놓는다. 이 엉뚱한 인식이야말로 모든 인식 중에서도 가장 참된 것이다. 즉 내가 나 자신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잊었던 친구를 만나서 깜짝 놀라듯이 어떤 낯선 도시를 앞에 두고 깜짝 놀랄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p. 97~98)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가 몸 담고 사는 사회가 그의 명상을 방해하지 않아주는 일뿐이다. (p. 136)
공허의 미학
'섬'을 떠올리면 무언가로 꽉 차 있기 보다는 텅 빈 풍경과 바람, 흙, 초목 몇 가지 정도가 떠오른다. 그래서 사적인 파라다이스 프로젝트를 위한 상상 속의 섬을 떠올릴 때 그 안에서 불안마저 흩어지는 정적과 고요를 느꼈다. 그런데 마음의 텅 빈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너무 많은 것들을 수집했다. 영감을 주는 수많은 물건들이 모두 '자료'가 되어 내 주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에서 터전의 이동이 얼마나 성가시고 곤욕스러운지 경험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동을 앞두고 있으니 정신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가벼운 상태를 염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순하고 항구적인 상태,' 그 안에 환한 빛과 같은 시간을 가득 고이게 하고 싶다. 이런 삶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을 선별해야 한다.
여행의 감각을 일상 안에서 기르는 동안, 나는 현실적인 기반 위에서 시적이고 명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이 꿈은 생각만으로도 가볍다. 수단을 단순하게 하여 내 삶의 모든 만남과 움직임이 결국 하나로 모여지게끔 한다. 그렇게 단일하고 단단하게 뭉친 시간 더미가 아주 작은 한 점이 되는 것. 분명하고 명쾌한 삶. <섬>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냈을 때의 마음이 나의 궁극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삶으로 나아가며 나도 이처럼 아름다운 언어를 손끝에 만질 수 있게 될까.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공(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p. 33)
최고의 사치란 무상으로 주어진 한 삶을 얻어서 그것을 준 이 못지않게 흐드러지게 사용하는 일이며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을 국부적인 이해 관계의 대상으로 만들어놓지 않는 일이다. (p.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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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겨울, 태어나 처음 파리에 닿았고, 혹한기의 추위를 피해 계획에 없던 이탈리아 남부로 피신했다. 그때 유일하게 들고 간 책이 장 그르니에의 <섬>이었다. 중부 산간지역에서 밤늦게 타이어 사고가 나 근처 피자집 사장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절벽의 차 안에서 눈을 붙였다. 다음 날 아말피 파노라마 해변에서 햇볕에 잠시 쉬고 있을 때 벤치 위에서 이 책을 계속 읽어나갔다. 마침 지중해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고, 103페이지에서 '아말피'라는 단어를 마주했을 때 문장과 공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투명한 환희를 느꼈다.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책에 '생명'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이 책은 여전히 내 삶에 존재하며 유효한 마법을 부리고 있다.
아, 그 기분 알아요.
책을 읽고 있는데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같은 배경의 영화를 보게 된다던가, 작중인물이 그 책을 읽는 모습을 본다던가….
오 영화를 보다가도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겠네요! 그럴 땐 정말 계시처럼 느껴질 것 같아요. ㅎㅎㅎ
키웨스트의 선셋 앞에서 영혼이 털린 경험에 비추면, 어떤 중요한 장소와 순간에서의 인식이 가장 참된 인식이란 말에 동의할 수 있겠네요.
요새 자주 안 왔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며 읽을 수 있어 참 좋습니다.^^
히히 감사합니다. :) 스팀잇 통해 글을 꾸준히 쓰는 훈련을 해보고 있어요ㅎㅎㅎ 위즈덤 러너의 과제들도 모두 도움이 되고 있답니다. :) 기쁜 밤 보내시길요!!
인터스텔라의 유령이 책장 너머의 쿠퍼였던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