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루요가
티베트 불교는 스승의 이미지를 수행의 방편으로 이용한다. 기독교 계열의 명상 전통에서는 성인이라고 일컫는 수도자들이라도 방편으로서 십자가 권위를 넘볼 수 없었다. 가톨릭 문화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스승의 이미지가 수행의 매개체로 이용되는 것이 왠지 거북했다. 하느님으로 육화된 예수를 감히 넘어서면 안된다는 어리석은 이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관점에서도 신(神)이 없는 곳이 있을 수 없다는 편재성을 고려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 고요한 마음으로 이끌 수 있는 스승의 이미지라면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부담 없고 친근할 것이다. 그렇지만 궁극의 고요한 마음 상태에 도달했다면 그 스승의 이미지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한다. 우상화된 정신의 족쇄도 벗어나야 진정한 해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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