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행전 3부] 자비소녀의 IR
"성함이 특이하시네요. 자비소녀 맞나요?"
"네. 자비소녀예요.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어떤 뜻이죠?"
"모든 것을 자비로 하라고"
자비소녀는 저소비녀의 사촌 동생이다. 그녀는 지금 투자 유치를 위한 IR 상담 중이다. 커다란 공유오피스에 위치한 투자사 사무실에는 여기저기 자신의 사업에 투자해달라는 창업자들이 침을 마구 튀어가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자비소녀는 사촌 언니인 저소비녀의 소개로 투자 심사역과의 미팅을 잡을 수 있었다. 수차례의 컨택에도 답신조차 없거나 당사의 방향과는 맞지 않아 어쩌구 하는 형식적인 거절 메일만 받다가 겨우 얻게 된 미팅이었다. 그러나 자비소녀는 투자를 구걸하러 온 게 아니다.
"자비소녀라. 모든 것을 자비로 하실 거면 투자는 왜 받으러 오신 거죠? 아, 농담입니다. 하하하" 담당 심사역이 농담을 던졌으나 자비소녀의 무표정에 부딪혀 돌아오자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공고문을 보았어요. 투자유치를 원하는 스타트업들을 환영하신다고 해서. 자금이 필요하니까 투자를 받으려는 거겠죠? 여러 번 두드렸는데 이제야 만나 뵙게 되네요."
"네, 사촌 언니분 부탁도 있고 해서. 그럼 어떤 일을 하시고, 얼마의 투자가 필요하십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말씀드릴 수 있는데 얼마의 투자가 필요한지는 제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네요."
"오호. 왜 그렇죠?"
"가능성은 제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 투자자가 판단할 몫이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사업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자금 규모가 있으실 텐데요."
"사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금만이 아니죠. 무엇보다 인연이 필요합니다. 같이 사업을 일으킬 공동 창업자와 동료들, 그리고 투자자 역시 인연의 한 고리죠."
"아, 그렇다면 대표님이 찾으시는 것은 투자금이 아니라 인연이군요."
심사역은 자비소녀의 말에 묘하게 끌리며 호기심을 느꼈다. 모두들 돈 달라고 찾아오는 자리에 자비소녀는 인연을 구하러 왔다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영리한 창업자들은 잘 알고 있다. 기관이나 투자사들이 원하는 창업의 방향. 즉 그러니까 투자금으로 위장한 통화를 태우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말이다. 어차피 심사역도 직원이고, 투자사 역시 자금을 모아 대리 집행하는 대행사이기도 한 것이니까. 결국 심사를 대행한다는 것은 수수료를 정당하게 청구하기 위한 요식행위로 전락할 위험을, 아니 여차하면 창업자와 짜고 투자금을 쌈짓돈 삼아 불법행위로 일탈할 가능성을 언제나 안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심사역의 마음은 가능성과 일탈의 경계에서 흔들리기도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앳된 소녀의 당당함에 마음이 끌리고 있다.
"그래도 돈을 벌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실력 있는 동료와 직원들을 채용하려면 그만한 보상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돈 벌려고 온 사람이 돈 벌지 못하는 시간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음.. 그래도 가능성을 확인했다면 버틸 수 있지 않을까요?"
"돈 벌 가능성이라는 게 객관적인가요? 그렇다며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을 텐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자비소녀의 말을 듣던 심사역의 머릿속에는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며 그럴듯한 아이템을 제시하던 수많은 창업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 허튼소리였지만 간혹 혹할만한 아이템을 가지고 나타난 창업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투자의 성공은 오히려 운에 가까웠다. 갑자기 경제위기가 닥쳐온다던가, 정책이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된다던가 또는 대표가 돈맛을 보고 자금이 엉뚱한 방향으로 집행되던지, 그마저도 아니면 공동 창업자들 간의 분쟁으로 복잡해지는 일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아니 이 세계는 그게 다다. 그리고 성공은 그것들의 우연한 반대편에 있었다.
"맞아요. 저는 돈을 벌 거구요. 성공하기 위해서 사업을 시작한 게 맞습니다. 그러려면 만나야 할 인연을 만나야 해요. 이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 만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을 말이죠. 하기로 되어 있는 일을 저는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집을 지어야 해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투자금과 지원금으로 좀비처럼 생존하거나. 그런 곳에 투자하고 싶으세요? 언제 무너질지 모를 모래 위에?"
"하하하 대표님 특이하시네요. 물론 아니죠. 그래서 그런 요인들을 미리 걸러내고, 시스템으로 통제하는 게 저희 같은 투자사들의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그걸 어떻게 하시죠? 아니, 그걸 어떻게 알죠?"
"뭐 나름의 기법이 있습니다. 주로 통계에 기반하죠. 대표자의 성향이라던가, 아이템의 차별성이라던가, 팀빌딩의 기법이라든가.."
"그 기준에,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가 통과할 수 있을까요? 엘리베이터에서 직원한테 '너 나가!'라고 말하는 대표를 보고 투자하고 싶으세요?"
"아 그건, 결과론적인 얘기죠. 저희들은 차라리 그런 개성 강한 대표들은 거르기도 해요. 모두가 아이폰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아이폰을 못 만드는 것이기도 하죠. 심사역님은 돈 벌고 싶은 생각이 없으신 것 같네요."
"그렇게 보이나요?"
"정말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은 사람이 어떤지를 따지지 않아요. 이 일로 돈을 벌 수 있느냐 없느냐만 따지죠. 그리고 돈은 실력에 반응하는 게 아니에요. 돈은 사람을 따라 흘러 다니는 것이죠. 거래의 수단이니까요. 그래서요, 그래서 인연이 중요한 거예요. 인연이란 사람들의 연결고리니까요.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는 어떤 세계와 연결하는가를 말하는 거예요. 한 사람 뒤에 하나의 세계가 있으니까요."
심사역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간 그가 투자 심사를 하며 중요하게 여긴 가치들이 그저 허상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지표와 숫자들. 시장 크기와 매출 목표. 엑시트의 규모와 상장의 가능성. 사실 그 모든 것들은 각종 인연들이 만들어내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소비자와 생산자가 만나고 유통과 배급에 연결되는 일은 모두 인연의 상호작용이다. 그리고 그 인연을 인위적으로 조작했을 때 문제가 생겨난다는 것은 매번 겪는 낭패의 대부분이다.
"일을 성실히, 열심히 하고 있는데 돈을 벌고 있지 못하다면 그건 실력과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인연의 문제예요. 아직 만나야 할 인연을 만나지 못한 것. 그게 소비자든, 동료든, 투자자든, 관련 업자든, 오로지 그것만이 문제인 거죠. 그리고 저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여기를 찾아온 거구요."
"그렇군요. 당장 이해가 되는 건 아닌데, 뭔가 대단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 같네요. 그러면 이 일은 얼마나 하신 거죠?"
"칠 년째에요. 학교 졸업하고 바로 시작했어요."
"인연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그럼 그간 얼마나 인연을 만나셨어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죠. 그리고 그중에 인연이라고 느낄만한 사람을 찾았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연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저를 판단하더군요. 저의 능력이나 배경, 실력 같은 거 말이에요. 저는 그게 먼저가 아니라고 여러 번 설득했지만, 사람들은 열광하거나 비하하거나. 암튼 중요한 게 뭔지 모르는 듯했어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주 소수의 확실한 인연들이 제 삶에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그들과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구요. 그리고 이제 투자자와 인연을 맺을 때가 되었다고 느꼈죠."
"어째서요?"
"돈이 다 떨어졌거든요."
"그러면 여태 자비로?"
"네, 자비소녀니까요. 사실 끝까지 자비로 해결해 보자는 게 제 처음 생각이였어요. 인연이 아닌 돈줄을 찾아 지분을 나누는 게 지저분해 보였거든요. 그런데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구요. 자비를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구요. 그래서 자비소녀인 건가? 암튼, 그래서 자비를 베풀어봐야겠다 생각했죠. 돈 벌려고 하는 사업인데 돈을 벌어서 사업을 하면 되지, 남의 돈을 빌려서 지분을 나눠주며 시작하는 일이 불필요해 보였지만. 그런데 누군가는 오로지 돈을 공급하는 인연도 있을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어차피 흘려보내지 않으면 아무리 풍족하고 청정한 상류여도 썩게 될 테니까요."
자비소녀는 인연에 대해 말했다. 어떤 이들과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결별하고 어떻게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지.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경험한 인연의 폭과 넓이는 여러 인생을 합쳐도 부족할 만큼 많은 경험과 지혜가 녹아 있었다. 그만큼 치열하게 사람들과 부딪혔으리라. 심사역 역시 그간 수많은 창업자들을 만나며 사람 보는 안목을 길러 왔다고 생각했지만, 필드 밖에서 보는 사람과 치열한 현장 안에서 직접 부딪히며 느끼는 경험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것과 날개를 펼쳐 직접 나는 경험의 차이가 같은 것.
"궁금하네요. 어떤 인연들과 함께하고 계신지."
"하하하 저와 인연을 맺어보시겠어요? 그러면 잘 알게 되실 텐데. 악연도 인연이고, 원망과 절망은 인연의 현상이죠. 하지만 그런 현상이 두려워 인연 맺기를 두려워하면 혼자 고립될 수밖에 없어요. 어떤 인연이든 다가오는 존재, 내미는 손을 거절하면 안 돼요. 거절하기 시작하면 자꾸 고르게 되거든요. 그러면 인연 맺기가 두려워져요.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의 한계를 확인해야 하죠. 물론 지독해요. 마음이 새카맣게 썩어들어가는 일이에요. 하지만 인연이란 뭐겠어요?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 만나게 될 사람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사람은 그것을 지나고 통과하면서 성숙해지는 거니까. 물론 마음의 성숙뿐만 아니라 일도 그런 과정을 통해 디벨롭되는 거랍니다. 흥망성쇠 없는 사업이 없으니까요. 저는 아직 어려서 성쇠를 경험할 일은 없었지만, 흥망은 이 짧은 인생에도 셀 수 없을 만큼 경험했답니다. 특히 인연의 흥망은."
"대표님이 말씀하시는 수준은 아닙니다만, 투자를 한다는 것 역시 인연을 맺는 일이라, 매우 신중하고 고심해서 선택하게 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투자 이후에는 오히려 관계가 역전되어 대표님들 판단을 따라가야 하니. 이게 참 어찌 보면 결혼하는 것 같은 일이죠."
"그러니까요. 그럴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분야보다 인연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분야 같은데 여전히 인연보다 숫자가 중요하신가 봐요?"
"숫자로 증명되어야 하니까요. 인연이 숫자로 증명되는 게 투자 업무가 아니겠습니까?"
"아니요.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지금의 투자자들은 인연을 숫자로 증명하기보다 거품을 남보다 숫자로 먼저 전화시키려고 타이밍 싸움을 하는 도박꾼 같아 보이던데요. 인연을 숫자로 전환시키려면 시간의 역사가 필요하거든요. 쌓이는 것은 도망가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타이밍 싸움에는 인연이 중요치 않죠. 그건 누구여도 상관없어요. 그날, 그 순간에, 아무나 그 일을 하겠다고 떠벌일 수 있음 되니까요. 그게 10년마다 되풀이되는 거품의 역사 아닌가요? 목소리 큰 놈이 다 가로채는?"
심사역은 뭐라 답할 말이 없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심사역을 빤히 쳐다보는 자비소녀의 눈빛을 피해 장표가 빼곡히 열려 있는 노트북을 닫으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 자비소녀에게 투자를 제안할 수도, 거절하고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소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인연의 입김이 강력하게 그를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까요?" 심사역은 소녀의 초롱초롱한 눈을 어렵게 마주 보며 말했다.
"뭘요?"
"말씀하신 인연 말이에요. 제가 그 인연이 되겠습니까?"
"하하하 지난 생에도 그러시더니."
소녀가 공유오피스가 떠나갈 듯 크게 웃자, 주변에서 각자 분주히 자신의 업을 프리젠테이션 하던 창업자들과 심사역들의 눈이 일제히 그 둘에게 쏠렸다.
"내민 손은 거절하지 않는 법이랍니다."
자비소녀는 자비로운 표정을 지으며 심사역에게 손을 내밀었다. 심사역은 소녀의 얼굴에서 염화시중의 따뜻한 미소가 느껴졌다. 그리고 소녀의 손을 잡는 순간, 깨달았다. 영겁의 시간을 거쳐온 두 사람의 인연을.
"대신 각오하셔야 해요. 인연의 경계를 확인할 때까지 생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돈은 바로 그 경계를 타고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올 거예요. 자연은 진공을 허락하지 않으니까요."
심사역은 자비소녀의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안주머니에 늘 가지고만 다니던 사직서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_ [마법행전 3부 6장] 자비소녀의 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