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공부 #4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과 미셸 앙리(Michel Henry)의 공동체 현상학: 의식과 느낌, 그 본질적 탐구
우리는 가족, 친구, 학교, 더 나아가 전 세계 인류라는 거대한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과연 '공동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서로 다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은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씨름해온 난제이다. 특히 에드문트 후설과 미셸 앙리는 이에 대해 깊이 사유했고 '무엇이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기반인가?'에 대한 핵심질문에 '의식', 그리고 '느낌(삶)' 으로 대답했다.
후설은 모든 경험의 주체이자 의미 부여의 근원으로서 '의식', 특히 직접 경험하는 자아인 '초월론적 에고'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의 관점에서 우리의 의식은 항상 무엇인가를 향하는 지향성을 가진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을 인식하는 모든 과정은 이 의식의 지향적 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타인, 즉 '알터 에고', 타인의 자아는 나의 의식 안에서 나의 몸과의 유사성에 대한 '연상'이라는 수동적 심리 작용을 통해 내 안에서 '구성'된다고 생각했다. 비록 타인의 자아가 나의 의식 속에 '비실질적으로' 침투하는 과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꿈이나 환영처럼 비현실적인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후설은 각자의 의식이 더이상 나눌 수 없는 가장 작은 입자인 모나드로 보고 각각의 모나다가 타자를 이해하고 관계 맺으면서 형성되는 '모나드 공동체'라고 주장했다.
반면, 앙리는 이러한 후설의 '의식 중심주의'에 근본적인 비판을 제기하며 그는 '의식의 지향성'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더 근원적인 토대로서 '절대적 삶'이 있다고 강조한다. 앙리에게 '절대적 삶'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판단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 안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가장 본질적인 '느낌'과 '감각'(파토스)의 차원을 말한다. 우리가 고통이나 기쁨을 느낄 때, 그것은 의식적으로 대상을 지향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 몸 안에서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경험이라고 보았다. 앙리는 '나'와 '타자'가 진정으로 '함께한다'는 것은 후설처럼 '나'의 의식이 타인을 '인식하고 구성'하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으며 서로의 '삶'의 감각, 즉 '파토스'를 직접적으로 공유하면서 진정한 유대, 즉 '파토스 공동체'가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두 철학자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후설은 공동체를 '개별 의식들이 서로를 인식하고 이해하며 맺는 관계'의 총합으로 보았고, 앙리는 '삶의 가장 깊은 본질에서 서로가 이미 연결되어 있고, 감정을 통해 직접적으로 공명하는 관계'로 보았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은 현실에서 이성적인 사람과 감성적인 사람의 차이처럼, 개인적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후설과 앙리는 자신들의 주장이 그러한 개인차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후설에게 의식과 지향성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선험적인' 의식의 구조이며, 앙리에게 '절대적 삶'과 '파토스'는 모든 인간 존재에 보편적으로 주어진 '내재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개인의 성향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작동 원리나 본질적인 차원이다.
또한, 이들 두 철학자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근원'을 주장한다. 후설은 감정조차도 의식의 지향적 작용을 통해 비로소 '나에게 의미 있게' 된다고 보며 의식이 모든 경험의 근원적 토대임을 강조하는 반면, 앙리는 의식 자체가 '삶'이라는 근원적인 에너지 위에서 작동하며, 고통과 같은 직접적인 감정 경험은 의식의 지향보다 '앞서서'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후설의 '의식 중심주의'는 명료한 의식의 분석에 강점을 가지지만, 인간 정신의 중요한 부분인 '무의식'의 영역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반면 앙리의 '절대적 삶'과 '파토스' 개념은 '의식 이전의 삶', '내재적인 느낌', '몸의 감각' 등을 강조함으로써, 의식적으로 인지되지 않거나, 경험에 의해 형성된 비의식적인 층위들을 포괄할 수 있는 철학적 기반을 제공한다. 따라서, '경험에 의해 형성된 무의식'이라는 측면을 고려하고 인간 존재를 더 깊고 폭넓게 이해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는 20세기 철학이 의식 너머의 영역으로 확장해 나간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이다.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외아들에 대해 우쭐하는 아버지의 어리석고 맹목적인 자만, 허영에 들뜬 젊은 여인이 온갖 치장으로 남자의 눈을 끌려는 노력, 이 모든 충동, 이 모든 아이 같은 짓, 이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은, 그러면서도 무섭도록 강렬하게 살아 있고 강렬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충동과 탐욕도 지금의 싯다르타에게는 아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들이 그것들로 살아가고, 그것들로 무한한 것을 이룩해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행도 하고 전쟁도 하고 무한한 고통을 겪고 무한하게 견디어 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들 각자의 번뇌 속에서, 그들 각자의 행위 속에서, 삶을, 불멸하는 생명을, 범을 보았다.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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