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 5. 내가 보이지 않는 걸까.
내가 보이지 않는 걸까. 평소에 수인은 우측보행을 ‘준수’한다.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헌법처럼 철저하게. 수인은 앞에 오는 인간들을 피해 길 오른편에 바짝 붙어 걸어간다. 하지만 그런 수인의 노력은 언제나 실패하고,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인간들과 부딪히고 만다. 나는 분명 여기에 있는데. 수인은 의문한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길보다 오히려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길에서 더 자주 인간들과 부딪힌다. 휴대폰에 고개를 파묻은 인간들이 휴대폰을 고대 로마 병사의 방패처럼 쳐들고 고라니처럼 수인에게 달려든다. 휴대폰을 들지 않은 인간들 역시 수인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은 수인을 그대로 관통해 수인 뒤의 전봇대, 자동차, 간판, 건물을 바라본다.
햇살이 너무나 강력했던 여름날이었다. 걷다 지친 수인은 우산으로 햇빛을 막고 잠시 멈췄다. 물론 길 오른쪽 끝에 바짝 붙어서.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고 자동차 두 대는 너끈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앞에 젊은 여성 한 명이 휴대폰을 보면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좌측보행이다. 길이 넓은데도 굳이 수인 쪽을 향해 다가온다. 수인은 좀 불안했지만 그녀가 나름 중간중간 앞을 주시하며 걷고 있어서 크게 경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곧 그 불안은 적중한다. 그녀가 수인 옆을 스치듯 걷다가 수인이 들고 있는 우산살 끝 부분에 이마를 꽁 박고 지나간다. 우산을 들고 있던 왼손에 고스란히 그 충격이 전해진다. 이 정도면 좀 아팠을 텐데. 수인은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그녀를 쳐다보지만 그녀는 길가의 나뭇가지와 부딪친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대로 제 갈 길을 간다.
수인은 며칠 전 책에서 읽은 스페인의 오래된 민요 가사가 떠올랐다. ‘다른 이의 눈에 보이지 않고 싶다면 가난해지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 수인은 어렸을 때 투명인간이 되고 싶었다. 수인은 들고 있던 낡은 우산과 자신의 남루한 옷차림을 쳐다보면서 마침내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아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