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점

in #krsuccess17 days ago (edited)

비둘기 크기 정도로 보이는 어떤 시커먼 것이 횡단보도의 하얀색 선 위에 널브러져 있다. 유심히 쳐다보니 너덜너덜 해진 남자 구두 밑창이다.

평일 아침 일곱 시 반의 사당역 주변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어떨 때는 군중의 밀도가 너무 높아 동물이 아니라 의식을 지닌 거대한 액체 덩어리들이 서로 교차하며 이동하는 것 같다.

특히나 횡단보도 앞의 액체 덩어리는 순간 두려움이 느껴질 만큼 지나치게 역동적이다. 신호등의 점멸에 정확히 맞춰 거대한 액체 뭉치로 고였다가 한 방향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가기를 일정한 주기로 반복한다.

인간들은 초록불이 켜지기 무섭게 사자를 피해 달아나는 아프리카 초원의 누떼들처럼 질주한다. 자신의 일터에 제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액체처럼 흐르고 짐승처럼 내달린다. 사자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생존에 쫓겨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아마도 저 밑창을 떨어뜨린 중년의 남자는 떨어져 나간 밑창을 다시 집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누떼들에게 휩쓸려 횡단보도를 건넜을 것이다.

나는 그를 자연스럽게 중년의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유행과는 거리가 먼 구두 밑창의 디자인과 반 이상 닳은 굽 한쪽 면을 봤을 때 도저히 젊은 남자라고 여겨지지 않아서다. 구두점. 중년의 남자가 하얀 횡단보도 위에 남긴 한마디 말. 수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그 위를 지나간다. 그리고 또 그 위에 몇 시간이 지나가면 중년 남자가 남긴 말은 깔끔하게 지워지고 횡단보도는 다시 백지로 되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