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단과 대한민국 포병창설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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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로부터 독립이 된 후 미 군정하에서 많은 정치단체들이 난립했다. 그 중 서북청년단은 극우 반공주의 청년 단체였다. 1946년 3월 5일 만들어진 월남자들의 단체들이 그해 11월 30일에 통합되어 발족했다. 이 단체는 1948년 12월 19일에 조직된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으며, 남은 일부는 1949년 10월 18일에 단체등록이 취소되어 소멸되었다. 서북청년단의 사무실은 한국 민주당 본부가 있는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서북청년단은 이승만, 김구, 한국민주당 등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았다. 1947년부터 이들을 견제한 이승만은 지청천을 시켜 대동청년단을 창설함으로써 족청과 함께 서서히 대동청년단에 흡수되었다. 서북청년단원 중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과 대한민국 경찰의 창설에 참여한다.(인터넷 자료참조) 특히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물론 서북청년단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으로 엇갈린다. 이들이 자행한 백색테러라든지 좌익의 무차별적 응징 등은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들이 대한민국 포병 창설에 어떻게 기여했고, 이들이 6.25전쟁 당시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가에 대한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국군은 여러 병과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포병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포병 창설에 노력했던 장은산을 비롯한 창설 요원들은 포병대원 모집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보병이 먼저 창설되면서 많은 인원이 그쪽으로 흡수되어 포병이 쓸만한 인원은 턱없이 모자란 형편이었다. 특히 포병은 숫자를 다루는 병과다 보니 일자무식자는 모집해도 쓸 수 없어 돌려보내는 일이 허다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시 포병 모집에 책임을 지던 장경석 소위(예비역 준장)은 입대전 서북청년단 감찰서기로 활동한 바 있었다. 그는 서북청년단 사무실에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서북청년단 소속대원을 건제를 유지해 포병으로 전환 입대할 것을 제의했다. 장경석을 만난 당시 서북청년단 문봉재 위원장은 대원들이 전원 포병으로 전환될 경우, 서북청년회의 간부들에 대한 처우문제, 그리고 입대한 대원들 가족들에 대한 생계문제 등을 우려했다. 이에 장경석은 간부 처우문제는 각 군에서 모집하고 있는 군 간부로 입대하는 것을 상부와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대원 가족들에 대한 생계문제는 포병에서 운용하는 사업을 통해 해결해 줄 것을 확약했다. 이로써 서북청년단 대원들이 건재를 유지한 상태에서 포병창설 요원으로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당시 입대한 서북청년단 대원들은 중졸이상의 학식과 더러는 대학을 졸업한 이도 있을 정도로 학력이 우수하고, 투지가 있었으며, 반공의식이 투철했다. 창설요원으로 1,800명이 입대했다. 1948년 12월 7일 이들은 포병 6개 대대 창설요원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창설된 포병은 각 사단으로 배치되어 전쟁이 발발했을 때,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6사단지역으로 배치되었던 16포병대대는 춘천 홍천 전투에서 적 병력 살상의 40%이상을 담당할 정도로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이는 적 문서에서 언급할 정도이다. 당시 북한군을 포로로 잡아 심문한 보고서에 따르면, 춘천 홍천지역에서 파괴된 자주포가 7대였는데, 이것 모두 한국군 포병사격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동해안 축선을 담당했던 8사단을 지원하던 18포병대대의 활약도 대단했다. 당시 8사단은 북한군 5사단과 일부 병력을 맞아 싸우다 주저항선에서 철수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에 사단장의 철수명령이 하달되자 18포병대대원들은 “언제는 사수하라면서 이제는 철수하라고 합니까? 저희는 여기서 죽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인식표를 땅에 묻고 보병들이 철수할 때까지 끝까지 남아 화력을 퍼부은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당시 18포병대대 포진지에서 200여구의 시체를 걷어냈는데 이들 모두가 북한군이었다고 한다. 적이 포진지까지 진입할 때까지 남아서 포를 쏘았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포병의 용맹함이 있었기 때문에 초기전투 중동부 지역에서의 선전이 가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