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바다를 연주한다

in #kr-writing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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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고흐, "생트마리드라메르의 바다풍경"

누군가 지금껏 가장 경이로웠던 체험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써내려갈 순간들이 있다. 20대의 굴곡진 나날을 지나오는 과정이었다. 부모님도 기쁘고 슬프고 꿈꾸고 상처받고 절망하고 질투할 줄 아는 '인격체'라는 사실을 마침내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해란 단순히 스스로 안다고 여기는 일과는 달라서, 사실이 사건이 되어 나를 꿰뚫고 지나가는 바람에 마음의 방향이 몇 도는 달라지는 사건이다. 우주선의 발사 각도가 1도만 달라져도 완전히 다른 별에 닿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부모님 역시 나와 내 친구들처럼 구체적인 시간을 사는 한 명의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종종 같은 종류의 놀라움에 차서 고백하듯이, 이럴수가, 부모님은 처음부터 부모님으로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들은 '부모'라는 이름의 종이인간이 아니었다. 부모란 가면에 불과하다. 독자적인 과거가, 삶이, 욕망이 먼저 있다. 어쩌면 자식인 나는 그저 당신이 주인공인 역사소설의 '등장인물K'쯤일 수 있으리라. 이 사실을 이해하는 일은 너무나도 신비로웠던 까닭에, 발견이라기보다는 흡사 발명의 느낌이었다. 그리하여 이 글은 부모님 중에서도 '아버지'라는 이름의 추상적 존재가 실은 자신의 다리로 걷는 살아있는 인격체였다는 사실의 발명 기록이다.

아버지는 일등 항해사였다. 어린 내게 5대양 6대주 곳곳 안 가본 곳이 없다며 이런저런 일화들도 이야기하며 먼 곳을 바라보곤 하셨다. 하지만 나는 바다를 누비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만 해볼 뿐이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항해사의 옷을 벗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고 첫 명절 때였다. 고향에 내려온 내게 아버지는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된 영자신문 몇 부와, 휘갈겨쓴 알파벳들로 가득한 서류뭉치를 꺼내어 보여주셨다. 신문에는 기울어진 배와 구조헬기의 보도사진이 실려있었고, 서류뭉치는 어떤 사고에 대한 법정 진술서였다. 그 옆으로 항해복을 입고 한쪽 다리를 의자 위에 올려 멋들어진 자세를 취한 젊은 아버지의 사진들이 있었다. 낡은 것들인데도 젊음의 비릿한 냄새가 자욱해서 무언가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영국 근해, 뱃사람들에게 '지옥의 입'이라 불리던 수역이 있었다 한다. 암초가 험하고 날씨가 변화무쌍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1980년대의 어느 날, 아버지가 탔던 화물선은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좌초되어 기울어진 배는 늪 속으로 빠져드는 말처럼 소리를 지르며 침몰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예외없이 내팽개쳐졌다. 난간이며 손잡이미 잡을 수 있는 모든 걸 붙잡고 버틴 시간은 백년처럼 길었다 한다.

마침내 구조대가 도착했다. 일등 항해사의 책임감을 져버릴 수 없었던 아버지는, 나이 많은 선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구조헬기로 올려보낸 후에야 마지막으로 배에서 발을 뗐다. 하지만 바다는 끈질기게 흉폭스러웠다. 갑작스레 송곳처럼 솟구친 파도가 헬기에 오르던 선원 한 명을 휩쓸어 바다로 추락한 것이다. 구조대는 인근 해역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그는 결국 구출되지 못했다. 구조실패의 소식을 들은 아버지의 마음은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내려앉았다.

기나긴 항해를 함께하던 동료의 죽음은 개인적인 슬픔과 비극일 뿐 아니라 사법적으로 '인명사고'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선장과 함께 영국의 법정에 서서 사고의 자초지종을 진술했다. 그리고 영국을 떠나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당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족이 아니라 경찰이었다. 슬픔을 추스리기도 전에 또 다시 국내에서의 사법 절차가 진행되었다. 당연하고도 냉엄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책임을 지고 항해사의 옷을 벗었다.

바닷가에서 물질하며 자라나 수년 간 파도 위에서 군인으로 근무하던 당신은 더 넓은 바다가 보고싶어 배를 탔다. 그러나 사고와 더불어 삶을 통째로 뭍에 건져내야 했고, 이제 수십 년간 좁은 땅 위에 갇혀 모진 풍파를 견뎌내야 할 운명이었다. 육지는 건조한 곳이라 당신은 발이 자주 텄다. 어린 시절의 나는 세상 모든 직업들을 가진 것 같았던 그 뒷모습을 기억한다. 당신은 어깨가 넓고 목이 굵은 유목민 같았다. 허나 머리가 커가면서 나는 당신의 어깨에 바짝 들어가 있던 것이 위태로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도고는, 가슴 어둡던 어느 날엔가 방 한 구석에서 부서진 마음을 홀로 주워담기도 했다.

가만히 생각하게 된다. 지금, 예순 너머의 시간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바다는 어떤 존재일까. 언젠가 고향의 바다를 방문해 가만히 바라보던 당신의 시선은 복잡하기만 했다. "저기서 동네 애들이랑 배 들어올 때까지 들어가 뛰어놀곤 했지." 허나 바다는 당신을 키우고 품었지만 내몰기도 했다. 이방인이 되어버린 당신에게 저 출렁이는 공간은 무엇으로 남아있는 것일까.

몇해 전부터 당신은 홀로 색소폰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구만큼 둥글고 새파랗고 또한 아득한 음색에 바다를 닮은 소리가 난다,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녹여낼 줄만 알았던 당신이 드디어 물질하듯 자신만의 무언가로 흘러가는 모습에, 나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몹시 기뻤다.

그리고 재작년의 어느 여름날, 가족여행을 떠난 통영 바닷가의 캄캄한 도로 위에서 파도소리 타고 물질하는 당신의 색소폰 소리를 듣던 밤이 있었다. 밤을 틈타 솟구쳐 오르는 금색 악기에선 어설픈 소리가 흘러나왔다. 낡은 그림자 너머로 너울대는 당신의 음색에선 비릿한 냄새가 났다.

나는 색소폰을 연주하는 아버지를 뒤에 두고 홀로 밤의 해변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문뜩 뒤를 돌아봤을 때, 먼곳에서 들리는 통통배 소리와, 침침한 가로등 불빛과, 벌레들의 탄성과, 쏴아아 부서지며 달려오는 파도 소리와, 그 너머에서 색소폰을 불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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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punk님 안녕하세요. 개수습 입니다. @sleeprince님이 이 글을 너무 좋아하셔서, 저에게 홍보를 부탁 하셨습니다. 이 글은 @krguidedog에 의하여 리스팀 되었으며, 가이드독 서포터들로부터 보팅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jjangjjangman 태그 사용시 댓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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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차에 도전하세요

그리고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소개받고 왔어요! 글이 너무 좋으시네요~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ㅎㅎ

글을 잘 쓰시네요
왕자님 소개로 왔어요 ^^

아버지의 마음은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내려앉았다.
....사고와 더불어 삶을 통째로 뭍에 건져내야 했고,

왕자님께서 큰 도움을...!!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글을 쭉읽으면서 저도모르게 깜짝 놀랐네요..저도 모르게 상상하면서 글을 읽어본 적은 처음이에요!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항상 격려 감사드립니다!^^

잘봤습니당. 전 아직 고등학생이라 그런지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느껴져요.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인데 아니겠죠 ㅜ

다들 마찬가지 아닐까요ㅎㅎ 뭐든 당학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쉬우니... 아직 연륜이 짧긴 해도 저 역시 머리로는 알아도 부모님이 영원히 곁에 계시지 않을 거란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진 않네요.

몰입하고 보았네요..
여러가지로 생각에 잠기게 하는 글이에요

저도 쓰면서 괜히 싱숭생숭해졌네요ㅎㅎ

스팀잇에 새로운 문학이 나타났네요 ㅎㅎ
잠자는 왕자님이 소개할만 합니다 ㅋ
자주 놀러 올께요~

"새로운 문학"이라니 과찬을..ㅋㅋ
넵, 자주 놀러와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sleeprince님 추천으로 왔습니다..팔로우해요. 그리고 꾸준한 활동 기대합니다.

왕자님 덕분에 외롭지 않아져 감사할 따름입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팔로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