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몰랐던, 동사의 맛

in #kr-pen7 years ago (edited)


글을 잘 써보겠다고 발버둥 칠 때마다 내 발목을 잡는 것은 어휘력이다. 쓰면 쓸수록 어휘력의 한계를 느낀다. 내가 지닌 낱말 그릇이 그리 크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처음 느꼈을 때는, 읽기 쉬운 글이 좋은 글이라고 자위했다. 그러다 점점, 적절하면서도 풍부한 어휘로 쓴 글이 마음 깊숙한 곳에 울림을 남긴다는 걸 알게 됐다. 글을 읽을 때 뜻을 모르는 단어가 있어도 앞뒤 문맥으로 적당히 파악하고 지나치는 습관도 조금씩 고쳤다. 

자연스레 사전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었다. 사전으로 하나씩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다 보니, 그동안 내가 뜻을 명확히 알지도 못하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는 걸 알았다. 또 한 단어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도 많았다. 최근 나는 글을 읽다가 이러한 단어들을 검색했다. 속절없다, 지켜보다, 흘러가다, 건네주다, 쫓다, 좇다, 아짐찮다, 아퀴. 이들 단어 중 ‘아짐찮다’와 ‘아퀴’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짐찮다 (형용사)   1. 남에게 신세를 지게 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다.  2.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아퀴 (명사)   1. 일을 마무르는 끝매듭.  2. 일이나 정황 따위가 빈틈없이 들어맞음을 이르는 말.    


네이버 사전 앱으로 찾아 정리한 내용이다. 혹시 몰라 위 단어들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찾아봤다. ‘아퀴’는 위와 같은 뜻으로 설명하고 있었지만, ‘아짐찮다’는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는지 단어 검색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사전 앱으로 ‘아짐찮다’를 찾아봤는데 ‘‘안심찮다’의 방언’이라는 게 아닌가. 다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안심찮다’를 찾아보았다. 


안심찮다 (형용사)   1. 남에게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  2. 안심이 되지 아니하고 걱정스럽다.   


네이버 사전 앱에서 다시 ‘아짐찮다’를 찾아보니, 오픈사전에 한 이용자가 작성한 뜻풀이였다. 어찌됐든 ‘아짐찮다’가 ‘안심찮다’의 방언인데, 내가 파악한 바대로라면 둘의 뜻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쯤 되니 마음이 복잡하다. 모국어로 글을 좀 써보겠다는데, 복잡한 게 왜 이리 많은지. 어쨌든 즐겁게 글을 쓰기로 한 마당에 더는 주춤하기도 싫어 좀 더 적극적으로 공부 아닌 공부를 해 보기로 했고 그 와중에 전문 교정자 김정선이 쓴 책 <동사의 맛>(도서출판 유유)을 만났다. 우리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사를 익힐 수 있는 책이다.



우리말에서 형용사와 함께 이른바 용언에 해당하는 동사는 음식으로 치면 육수나 양념에 해당한다. 제 몸을 풀어 헤쳐 문장 전체에 스며들어서 글맛을 내기 때문이다. 육수나 양념과 마찬가지로 잘 쓰면 감칠맛까지 낼 수 있지만 잘못 쓰면 맛은커녕 허기를 채우기도 어려워진다. 육수에 견준 김에 한 발 더 나아가자면, 다양한 육수와 양념이 화학조미료에 밀려나듯이 한자어에 ‘-하다’나 ‘-되다’를 붙여 쓰거나 대표되는 동사 하나로 한통쳐 쓰면서 멀쩡한 우리말 동사들이 때 이르게 죽은말 취급을 받고 있다. ‘그르치다’를 써도 될 때에도 굳이 ‘실패하다’를 쓰고, ‘견주다’, ‘비기다’보다 ‘비교하다’, ‘비하다’를 더 자주 쓰고, ‘가시다’, ‘부시다’를 ‘씻다’로 한통치는 식이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말 관련 책에서도, 음식으로 치면 주재료에 해당하는 명사에 밀려 동사는 늘 찬밥 신세다. 그러다보니 제 몸을 풀어 헤친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만큼 동사는 활용형이 다양한데도 마땅히 찾아 확인할 곳도 없다. 어떤 건 도대체 기본형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사전에마저 한두 가지 활용형 말고는 달리 밝혀 둔 게 없다. 문제는 이런 건 누구한테 묻기도 뭣하다는 것이다. ‘밥이 눌기 전에 불을 꺼라’라거나 ‘언젠가 크게 데일 날이 올 거야’, ‘목메여 울다’, ‘체중이 분 뒤로 울해졌다’, ‘바쁘면 얼굴만 비추고 가’, ‘설레이는 마음’, ‘에둘러 가다’, ‘우울할 땐 볕을 쬐여라’, ‘일에 치어 산다’라고 쓰는 게 맞는지 틀리는지 누구한테 묻고 어디에서 확인한단 말인가(모두 잘못된 표현이다).   (10p)


머리말을 짧게 인용하고 싶었는데 너무나 주옥같은 말이라 좀 더 길게 인용했다. 김정선 교정자는 “오랜 시간 교정지와 씨름하면서 우리말 동사만 다루고도 제법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한 권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동사의 맛>을 썼다. 

책은 1,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가려 쓰면 글맛 나는 동사’, 2부는 ‘톺아보면 감칠맛 나는 동사’다. 말 그대로 1부에서는 가려 쓰면 글맛 나는 동사를, 2부에서는 톺아보면 감칠맛 나는 동사를 다양한 예와 한 남자와 여자의 사연으로 풀었다. 아하 그렇구나, 하며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을 인용해 본다.    


나누다 / 노느다
‘나누다’는 하나를 둘 이상으로 가르거나 여러 가지가 섞인 것을 구분해 분류하거나 말이나 의견을 주고받거나 음식을 함께 먹을 때 쓴다. 반면 ‘노느다’는 여러 몫으로 갈라 나눌 때만 쓴다. ‘나누다’는 ‘나누어(눠), 나누니, 나누는, 나눈, 나눌, 나누었(눴)다’로 ‘노느다’는 ‘노나, 노느니, 노느는, 노는, 노늘, 노났다’로 쓴다. (69p)   


뻗대다 / 삐대다   
고집스럽게 버티는 건 뻗대는 것이고, 눌어붙어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삐대는 것이다. 오래전 일이다. 대학 때 학생 운동 조직에 몸담았던 친구가 한동안 내 방에서 지낸 적이 있다. “이렇게 늘 삐대서 어쩌냐.” 하고 친구는 미안해했지만 정작 내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당시 내가 살던 집이 청와대 근처에 있었던 데다 그때는 동네 곳곳에 의경 초소가 서 있었던지라 밤마다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번은 밖에서 큰 소리가 들리기에 나가 봤더니 친구 녀석이 불심검문에 걸려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콩닥거리는데 외려 친구는 동네 주민을 상대로 집 앞에서 불심검문을 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뻗대는 것이었다. (137p)   


책을 읽으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우리말을 가벼이 여겼는지 알 수 있었다. 태어나 배운 말이니 굳이 갈고닦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지 부끄러웠다.

책은 지난해 말부터 읽었다. 원래 여러 권의 책을 오랜 시간에 걸쳐 읽지만 <동사의 맛>은 유난히 오래 붙들고 있었다. 책이 다루는 동사 중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어 읽는 속도가 더뎠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랜 시간 이 책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다행히도 책 앞부분에 색인이 있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동안 몇 번이고 책장을 들춰 보기 좋다.

말이나 글이 한 사람을 이루는 큰 부분인지, 이제 내 옆에 없는 사람들의 다시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에 더 깊이 새겨진다. 앞서 ‘나누다/노느다’ 부분을 인용했다. ‘노느다’란 말을 처음 들은 줄 알았는데, 활용형을 보고 그게 아님을 알았다. ‘노느다’는 어렸을 적부터 익숙하게 들었던 말이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노나 먹어.”란 말을 자주 하셨다. 용돈을 쥐여 주시며 과자 사서 친구들이랑 노나 먹으라고, 장떡이나 전 같은 걸 내주시며 동생들이랑 노나 먹으라고 하셨다.

“하나콤 노나 먹어.” 하는 할머니의 얇고 작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자꾸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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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께서 설거지를 그릇 부시다라고 하셔서
부시다는 말은 알고 있었는데
다른 단어들은 저도 생소하게 느껴져요
제가 틀리다고 알고 있던 바른 말도 보이고요..
좋은 내용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해요!
리스팀합니다

설거지하자, 라는 말을 그릇 부시자, 로 할 수 있는 건가요? 들어본 말 같기도 하고 처음 들어본 것 같기도 하네요. 가끔 어르신들 말을 들으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돼요. 시간이 흐르며 어떤 말들이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 생겨나기도 하나 봐요.
글 관심 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릇을 부시다'가
그릇 따위를 깨끗이 씻다
라는 뜻을 갖고 있더라고요...
전 처음에 왜 자꾸 어머님이 그릇을 부시라고
(깨뜨린다로 알아들음)
하시지? 했어요ㅎㅎ

독자층에 따라 다르겠지요. 독자들마저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를 써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건 그래요! (라며 점점 공부를 소홀히...)
어쨌든 읽기 편한 글이 좋은 글이겠지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우리나라 말이 이렇게 보면 외국인들이 참 어렵게 느껴질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ㅎ

그러게요. 반대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아무리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도 모국어 화자가 가질 수 있는 어휘력 같은 건 얻을 수 없겠죠.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림으로 치자면 물감색을 '바다를 닮은 파랑'으로 할지 '하늘을 닮은 파랑'으로 할지 고르는 일과 비슷한 일이네요ㅎㅎ

그럴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ㅎ 바다를 닮은 파랑, 하늘을 닮은 파랑 중 고민하는 것도 꽤나 어려운 일일 것 같은데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관심 갖고있었던 책인데
빨리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팔로우하고 갑니다~~

안녕하세요^^
아마 책 읽어 보시면 재미있을 거예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휘력이 풍부한 건 글을 쓸 때 아주 유용하죠. 근데 더 중요한 건 표현하는 능력이겠죠! 구슬이 서말이라도 잘 궤어야 보배가 되듯이 자신이 알고 있는 어휘력안에서 그걸 구성해 내는 능력을 키우는 것도 좋지 않나 싶습니다. 멋진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어휘력 안에서 그걸 잘 구성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걸까요?ㅎㅎ 글을 쓴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읽었어요
만나니 반갑네요^^

옐로캣님 소식을 한동안 못 봤네요. 곧 블로그로 놀러가야겠어요.
댓글 감사해요^^

제게 있어서 동사는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글에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제게 있어서 형용사는 "무엇인가를 개입을 배제한 채 관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동사와 형용사는 글에 있어서 양념과 육수인 동시에, 음식에 있어서 빠질수 없는 재료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소통하는 것 또한, 동사와 형용사를 결국 주체적으로 행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과 글에서 동사와 형용사는 결국 그 사람의 모습을 태도를 삶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삶을 동사를 통해/형용사를 통해 기억하고 추억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항상 시 같은 댓글을 남겨 주시는 거죠..?
언어가 생각을 더 정교하게 가다듬어준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동사와 형용사의 차이, 이것이 만들어내는 삶의 모습 같은 건 생각해 보지 않았네요.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저를 600번째로 팔로우하셔서 찾아왔습니다.
글 잘 읽고, 미약하나마 풀보팅하고 갑니다^^

안녕하세요^^ 쓰신 글들 보고 소식 받아 보고 싶어서 팔로우했습니다. 댓글로 흔적이라도 남길 걸 그랬나봐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글 읽으러 종종 들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