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의 대국

in #kr-diary14 days ago

 누구와 만나서, 어떤 대화를 했고, 주변의 환경은 어땠으며,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까지도, 되짚어보면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순간이지만 명확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내가 지금 떠올린 건 6살에 동네 친구에게 건낸 농담인데 그 농담은 그 날 아침, 아버지가 어머니에 들려주었던 농담이었다. 가족들 모두에게 전한 게 아니라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했던 농담을 엿듣고 친구에게 그대로 써먹는다는 게 쑥스럽게 느껴져서 나는 아주 속삭이며 이야기했다. 껌을 사면 안에 들어있던 유머집 수준의 유치하고 무해한 농담이었으니 아이에게 부적절한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래야 한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지금도 속삭이는 걸 못하는 내가 아무리 비밀스럽게 이야기해도 집에 있던 어머니에게는 내 말이 들렸던 모양이다. 저녁 식사 중에 어머니는 그 사건에 대해 아버지에게 전했고, 당연히 아무 것도 아닌 사건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아까는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순간이라고 했지만, 해마가 강렬한 감정을 느낀 순간은 곱씹을 가치가 있다며 담아둔 모양이다. 사소하지만 선명한 기억을 계속 떠올려봐도 그렇다. 친구와 둘이서 지나치게 오래 웃어서(웃은 이유를 밝히는 것도 한심한 아주 실없는 웃음이었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산소를 갈구했지만 도저히 웃음이 멎지 않았던 기억. A는 B와 함께 놀고 있던 무리에게 B가 지루해하는 것도 모르냐며 강제로 하던 걸 멈추게 만들었는데 B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굉장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나 또한 당황스러웠던 기억. 별 의미 없지만 강렬한 감정을 동반한 순간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비록 모든 기억이 이런 형태는 아니겠지만, 선명하고 오래가는 기억을 위해서 반드시 일반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비일상적인 요소가 필요하진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내 할아버지는 내가 아는 많은 '아버지'들처럼 자식들이 독립한 후에는(그 전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내가 어릴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는 건 기억한다.) TV를 보며 술을 마시는 게 일과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해야 하는 건 점점 줄어들었으니 그 시간은 계속 늘어만 갔다. 가족들은 술을 줄이라는 말만 할 뿐이니 술이 정말 좋건 나쁘건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니 스스로를 더욱 고립시키게 되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삼대가 살아가는 거대한 공간에 살았지만 대가족의 가장이 아니라 불청객(침실에서 나와 가족들 앞에 모습을 보이는 건 대게 술을 찾을 때 뿐이었다.)이 되어 작은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지냈다. 그 상태로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할아버지는 치매를 앓고 있다. 상술한 것처럼 술을 오래, 많이 마시기도 했고 외상도 있었으니 그 무기력한 날들이 할아버지가 기억을 잃게 된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분명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무기력하게 보낸 시간들 또한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손주들을 알아보지 못 한다. 자신에게 손주가 있고, 몇 명이며, 이름은 무엇인지는 기억하지만 기억 속 모습과 현재의 모습은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절마다 할아버지부터 증손까지 모이지만 그 중 절반은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모르는 사람이니 꽤 괴상한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도무지 그런 할아버지를 어떻게 대하는 게 옳은지 알 수 없어서 언제나 아무 말도 없이 곁에 앉아만 있었다. 공연히 내가 누구라며, 기억나지 않냐며 묻는 건 싫었고(할아버지를 병자로 대하는 느낌이라서), 그럼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어릴 때 할아버지와 소통하는 건 언제나 바둑판 앞에서였으니 언젠가 꼭 할아버지와 바둑을 두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번 설에는 그 다짐이 행동으로 이어졌다. 할아버지와 바둑을 두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인지 예전처럼 꾸짖거나 귀를 당기고 코를 비트는 대신 아무 말 없이 돌만 옮기셨다. 막내 삼촌은 9점 접바둑을 권했지만(실제로 어릴 때는 9점 접바둑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예전과는 달랐다. 너무 빠르게 승부가 났다. 나는 9점은 너무 많다며 너스레를 떨고, 할아버지가 혹시 언짢은 건 아닐지 표정을 살피며 돌을 정리하고 할아버지에게 흑을 건넸다. 덤이 없어도 내가 유리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나에게 이길 수 없는 상대였으니 이렇게 이기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질 수도 없었다. 가족 중 하나는 전력으로 두지 말고 져주라고 했지만, 그건 할아버지에게 승부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승부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건 무례하다. 할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그런 건 시간낭비라고 했다.
 승부에서 시간낭비를 원하지 않는 성격은 그대로였는지 한 귀에서는 결착이 나지 않았고 다른 귀에서 내가 유리했으며 두 귀를 잇는 변에서 내가 크게 이겼을 때, 할아버지는 곧바로 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만하시게요?" 내가 물었더니, "더해서 뭐하노." 무심하게 계속 돌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정리를 마치고 다시 소파에 몸을 내던지는 할아버지의 태도가 말없이 그만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기에 나는 악수를 청했다. 할아버지는 몸을 일으켜 정말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받아주셨다. 그리고는 평소라면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았을 할아버지는 연신 싱글벙글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들이 뭘 하는지 살피며 돌아다녔다. 할아버지에게도 오랜만에 대국이 즐거웠던 것 같아서 원래도 좋았던 기분이 더 좋아졌다.

 아마 할아버지는 다음에도 나를 알아보지 못 할 것이다. 나와의 대국도 떠올리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허무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지금 할아버지의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따금 무언가를 저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지난 추석에 TV를 보다가 고양이가 나오니 "고양이 나오네. 고양이 키운다메."라고 나에게 말을 건넸는데, 아마 가족들과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렇듯 지나가듯 한 이야기도 때때로 떠오른다면 무척 즐거워했던 그 대국은 기억 어딘가에 남아서 언제 어느 때에 한 순간이라도 나와의 대국을 떠올리며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고 그 순간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내가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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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지 않는 할아버지 본인은 오히려 무척 자유롭고 평안하실지도 몰라요.

그러시길 바라고 있어요. 억지로 떠올리는 건 힘들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