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백탑청연(白塔淸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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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onza

빙 둘러 있는 성 가운데에 백탑이 있다. 멀리서 삐죽 솟은 것을 보면 마치 설죽(雪竹)의 새순이 나온 듯하다. 여기가 바로 원각사(圓覺寺)의 옛터다. 지난 무자년(1768년)과 기축년(1769년) 사이에 내 나이는 열여덟, 열아홉이었다. 미중(美仲) 박지원(朴趾源) 선생이 문장에 조예가 깊어 당대에 으뜸이라는 말을 듣고, 마침내 백탑의 북쪽으로 찾아뵈었다.
 
당시 형암 이덕무의 집이 북쪽으로 마주 보고 있었고, 낙서 이서구의 사랑은 그 서편에 솟아 있었다.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서상수의 서루였고, 거기서 다시 꺽어져 북동쪽으로 가면 유금과 유득공이 사는 집이었다. 나는 한번 갔다 하면 돌아오는 것도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연거푸 머물곤 했다. 시문이나 척독을 썼다 하면 권질을 이루었고, 술과 음식을 찾아다니며 밤으로 낮을 잇곤 했다.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

지금 탑골공원에 부자연스럽게 유리벽으로 보존되고 있어 되려 빛바랜 빈티지 감성이 아쉬워진 원각사지 10층 석탑 고탑주위, 그시절에는 틀림없이 빛나는 빈티지였을, 300여년전 북학파 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고 한다.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은 진부해져 버린 조선의 성리학 주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필체로 문예에 생기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들의 문집을 살펴보면 개혁가로서의 측면 뿐아니라 깊어가는 밤 백탑 위에 떠있는 달빛 아래서 술을 벗삼아 서로의 감정을 나누며 때로는 일상을 소소하게 대화하던 그들의 모습이 영화처럼 떠오른다. 남산 근방에 살고 있는 큰 형님 뻘인 홍대용을 찾아가 거문고 가락과 함께 즐겼던 고아하고 그윽한 낭만 파티도 멋스럽다. 그들의 교류는 귀족부터 서얼까지 그리고 나이를 불문하고 허물없었기에 훗날 문예가들에게 18세기 조선 문예 부흥의 중심 축이 되었다는 평가와 찬사를 받는다.

21세기로 넘어와서 국제화의 시대, 라다크에는 백탑이 거리마다 널려있다. 그렇다고 거대하지도 않고 소박하다. 고지대라서 물자는 풍부하지 않고 푸른 나무도 별로 없는 황량하고 거대한 산 사이로 흘러가는 물길은 푸른 하늘처럼 맑고 맑아 수정빛의 입자가 녹아든 것 같아 감탄사가 저절로 움터나온다. 여름이라면 고지대 추위의 걱정은 내려놓을 수 있다. 맑은 밤이라면 어떨까? 백탑 위에 뜬 달빛을 은은하게 머금고 거닐고 있다면 자연의 시(詩)속에 그대로 동참하게 된다. 이러니 21세기 문예부흥의 중심축이 되지 못할지라도, 사실 그럴 필요조차 없다. 대중의 관심과 책임에 얽매일 필요도 없는 탈중앙화의 시대니까, 지금은 소소하게 행복을 느끼면서 누군가 알아주지 못한다 해도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이 지금 그자리에서현존을 만끽하면 그대로가 천국이고 열반이다. 백탑청연(白塔淸緣)의 지기(知己)들과 함께하면 되니까,

0480 CHOONZA ROAD IN LADAKH 2025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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