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 감수성
자가격리 중이니 갇힌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잠깐 테라스에 앉아 커피 한 잔, 담배 한 개비를 피우는 여유를 부릴 수 있지만 휴대폰에 장착된 자가격리 앱이 내가 외출을 하나 안 하나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뀌진 않는다. 이 사실이 줄곧 나를 괴롭히고 있다. 나의 자발적 의지가 아닌 타의, 외부 환경, 시스템에 의해 강제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 말이다. 고립감은 둘째 치고 무기력감에 휩싸인다.
그러다 보니 생각도 자꾸 부정적인 쪽으로 쏠린다. 자가격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거의 별 게 없는데 한숨 나고 짜증 나는 일에만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가격리가 끝나면 내게 거처를 제공할 친구가 오늘 아침 전화를 해와 모시고 있는 노모가 내가 혹시라도 코로나 바이러스를 옮길까봐 엄청나게 걱정하고 있다며 내게 세번째 백신을 맞고 들어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저렇게 안심을 시키고 전화를 끊었지만 이런 대화를 하고 나면 하루 종일 기분이 가라앉는 것이다. 안그래도 격리 중인데 격리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을 것 같은 기분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경도된 이들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와 대화가 완전히 불가능해진 세상 속에 있는 느낌.
내가 먼저 떠나온 뒤에도 책 마감 작업을 위해 유럽에 남아 있는 라라 님의 기행문을 찬찬히 읽어보다가 나는 아주 작은 아름다움과 행복을 발견해내는 그의 감수성에 감탄했다. 그의 글을 읽다가 문득 내게 미적 감수성이 마모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능력 말이다. 어째서 이렇게 됐을까? 한동안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내 인식 체계가 그런 쪽으로, 그러니까 외부 세계의 부조리함을 확대해서 바라보는 쪽으로 훈련돼 왔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평론가라는 게 그런 직업이라고 여겼다. 영화를 보더라도 흠결을 찾아내려고 부지불식간에 애쓴다. 어쩌면 나는 일종의 직업병에 시달리고 있는 건지도. 그래서 시야가 영화 바깥으로 나와 세상을 볼 때도, 사람들의 표정에 스민 어둔 그림자를 보고, 언어와 태도에 섞인 무례함을 먼저 본다. 세상의 다양한 면모 중에 사려깊지 못하고 폭력적인 것들만이 인식 체계 속으로 필터링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그게 소화 과정을 통해 적절하게 분출되지 못하고 납 중독처럼 쌓이고 쌓이기만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방법을 까먹은 셈이다.
숙소 앞마당에는 키 큰 대나무가 여럿 서 있다. 처음 여기 왔을 때가 지난 3월이었는데, 그때 주택가 안쪽에 대숲이 숨어 있다는 사실에 경탄한 적이 있었다. 그 대나무가 여전히 쭉 뻗은 채 숙소 앞 풍경을 만들고 있는데 나는 왜 더 이상 경탄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여 테라스에 앉아 다시 풍경을 시야에 담았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내 노마드 선배이자 이탈리아 친구이며 사진 작가인 루카가 나와 여행을 다닐 때 사진을 어떤 방식으로 찍었는지 상기했다. 내가 주로 풍경 전체가 나오도록 풀샷을 찍는다면 그는 늘 작은 것들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아마도 그렇게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재주가, 그가 4년 동안이나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여행을 이어갈 수 있는 아주 큰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피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계속해서 그렇다는 사실을 곱씹는 건 건강하지 않은 대처겠죠. 이미 주어진 상황, 그 상황에 만족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끝없이 불평하는 것도 답은 아닙니다.
비관적인 시선은 그것이 합리적이라며, 이성적이라며 스스로를 정당화 하려고 하겠지만,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분명 결점을 보는 눈은 반대로 아름다움도 찾을 수 있는 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