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일기 #156
2024.10.16(수)
몇일 전 큰 아이가 기죽은 목소리로 연락이 왔다. 목소리만으로도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했고, 자초지종을 들으니 아이가 엄마와 다툼이 있었고 조금 거친 행동을 했는데, 그로인해 혹시 아빠에게 혼날까봐 걱정이 되서 그랬던 것 같다. 사춘기인 첫째는 키도 크고 힘도 쎄지고 아주 가끔은 감정적으로 대응할 때가 있어 아내가 감당하기 어려운(또는 당황스러운)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사춘기라는 것이 모든 것들의 면죄부가 될 수는도 없고, 아이가 성장하는 중에 당연히 겪는 감정의 혼란이기 때문에 이 시기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도 사춘기 아들을 키우는 건 처음이고, 나 자신도 마음을 컨트롤 하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도와 줄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감정은 참는게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라길래 책도 읽어보고 혼자서 생각도 해보지만 나도 여전히 내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아직 서투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읽고 생각한 시간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이 과정중에 조금씩 내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있게 되었고, 과거보다 훨씬 나아진 내가 되어 가는 것만은 확실히 느낀다.
감정이라는 것을 분류해보면 이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긍정적 감정: 기쁨, 감사, 사랑, 흥분, 자부심, 평온, 희망, 즐거움, 영감, 연민
부정적 감정: 분노, 슬픔, 두려움, 혐오, 불안, 수치, 죄책감, 좌절, 외로움, 실망
긍정적인 감정은 편안하지만 너무 뻔하고 재미가 없고, 학교나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 들을 법한 너무나 평범한 것들이다. 반면, 부정적 감정은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꿈틀거리게 만드는 힘이 느껴지고, 눈이 밝아지고 정신이 각성되고, 호흡이 가빠지고, 전투력이 생기고, 흥미진진해 지는 느낌이 든다. 부정적인 감정은 싫지만 살아있는 것 같고, 긍정적인 감정은 좋지만 죽은 것 같다. 게다가 SNS나 미디어, 그리고 온라인 게임들은 사람의 흥미를 끌기위해 앞다투어 자극적인 뉴스나 영상들을 생성해서 돈을 벌고, 현대인들은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감정에 둘러쌓여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산다. '그 사람이 잘못이다.' '이게 문제다.' '정말 최악이다.'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말세다.' '세상이 미쳐돌아간다.' 이런 부정적 생각과 말은 결국 내 주변을 모두 부정적인 환경으로 설정해버리는 효과를 만들어내고 불안과 공포와 우울속에 갇히게 만든다. 실제로 세상이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세상을 그렇게 설정해버리면 두개골 안에 갖힌 뇌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그곳에서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부정적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시작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걷잡을 수 없고, 세상을 더욱 부정적으로 설정하게 되는, 끝이 없는 어둠의 미로에 빠지게 된다. 그 미로에 빠져 헤메다가 결국 미노타우로스에 잡아 먹히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내 감정을 알아가는 과정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릴 땐 참 사소한 일로도 쉽게 분노했다. 특히 자존심이 상하면 불같이 화가 터져나왔다. 보통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자존심에 매우 집착한다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 자존감이 많이 낮았던 것 같다. 성인이 되고,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도 겉으로는 아닌 척 노력했지만 실제 내 안의 분노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갈수록 그런 감정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집앞 기둥에 묶여서 침입자를 쫒아내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개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매사에 쉽게 분노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볼때마다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스스로 바보같이 느껴졌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너무나 평범한 날. 하지만 그날도 어떤 사건으로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와 있었고, 모두를 밀어내고 있었고, 외로웠고, 불안했고, 슬펐다. 내 인생이 너무나 한심하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모든 생각들은 극단으로 치닫았다. 늦은밤 혼자 걸었다. 원래 오디오북을 들으며 걷는 걸 좋아했지만 그날은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분노로 터질 것 같았다. 2시간 정도를 걷고나니 온몸에 들어갔던 힘이 서서히 빠졌다. 우중충한 먹구름은 갑자기 빗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온몸이 가랑비로 서서히 젖어가고 옷이 점점 무거워졌다. 비가 내리는 산책로를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벤치에 앉아 비를 맞으며 떨어지는 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신이 맑게 밝아지고, 모든 감정이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텅빈 것 같았았고, 대신 약간 편안함과 평온함이 나를 채웠다. 그때 내 머릿속에서 어린애같은 불만이 떠올랐다.
'나도 잘할려고 한건데.'
분노가 담기지 않은 순수한 불만이었다. 내 안의 나와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다. 내 자신이 나의 진정한 친구가 된 것 같았고, 내 스스로 이해를 받고 있었다. 분노가 사라지고 나니 그 사건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서로 잘 해보려고 한건데 결국 엉망진창으로 대화가 끝이났다. 원하는 목적지는 같은데, 서로 잘난척만하고 상처만 주다보니 정작 필요한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진창싸움만 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비를 맞으며 한시간동안 그 때의 상황을 복기했다. 내 자신이 어이가 없어 웃음이 피식 나왔다. 내가 잘났다고 해도 이 정도 밖에 안된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서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물론 상대방도 잘못한 점은 있었지만 그건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내 머리가 분노에 휩싸여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고, 그로인해 대화의 방향이 엉뚱한 것으로 간 것이 문제였다. 한명이라도 분노에 휘둘리지 않았다면 대화의 방향은 정확했을 것이다. 그게 누구든 상관없다. 그것이 나였으면 되는 거였다. 모든것이 명확해지는 것 같았다. 너무나 홀가분 했고, 삶의 이정표를 발견한 것 같이 기뻤다. 이 중요한 깨달음을 까먹을까봐 집에 들어가서 즉시 기록을 남겼다.그 때의 대화와 순간순간의 내 감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어떻게 말을 했어야 했는지, 상대방은 왜 그런 말을 했어야 했는지, 무엇이 부족했고, 어떤 것들이 필요했는지 상세하게 다 적었다. 상대방에게 줄 편지도 적었다. 나의 진심어린 사과와 반성, 그리고 대화의 목적이 담긴 편지였다. 그리고 다음날 상대방을 만났다. 편지는 주지 않았다. 대신 직접 사과를 하고 편지의 내용으로 대화를 나눴다. 상대방도 갑자기 변한 나의 태도에 당황하였지만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대화는 아주 순조로웠고, 말이 잘 통했다. 그 후로도 큰 문제 없이 잘 되었다.
분노는 내 눈과 귀를 모두 막아버린다. 그리고 나를 투정쟁이 어린애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분노에 휩싸였을 때 가능한 빨리 그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운동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보거나, 잠을 자거나, 여행을 가거나, 또는 좋아하는 일에 집중을 하는 것도 방법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이든 자신에게 효과가 있는 방법을 찾아서 그 분노에서 벗어나는 것이 1단계다. 그리고 기록을 통해 내 분노의 패턴을 찾고, 내 약점을 보안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2단계다. 보통은 1단계만으로도 충분하지만, 큰 충격이나 해결해야할 필요성이 절실한 경우는 2단계가 필요하다.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보다 글을 써보면 핵심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3단계는 독서다. 책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과 생각, 그리고 사례들이 들어있고, 이를 통해 그들의 노하우를 터득할 수 있다. 책에서 한 줄이라도 마음에 와 닿는 글귀를 찾는다면 그 독서는 성공한 것이라고 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언제라도 책을 읽는 것이 좋다. 1, 2단계와 달리 3단계는 꾸준히 실행해야 하는 만큼 자신에게 맞는 올바른 독서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3단계를 꾸준히 실천하고 나의 약점을 조금씩 보완해 간다면 언젠가는 부정적 감정의 미로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는 날이 있을꺼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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