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각오하고 읽어야 할 책들이 있다.
얼마전 주저하던 토지부터 시작해서 한강의 책들까지. 언제나 나 자신의 내면을 어루만지기 바쁜 삶을 살았던 지난날들이라 그간 읽은 책들의 목록을 돌이켜보면서 단 한번이라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걱정해 본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았다.
사실은 현실에서 도망쳤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쩐일인지 요즘은 한국에 여성작가분(나는 개인적으로 "여류작가"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방금 길게 썼다가 삭제)들의 80년대 삶을 그려내는 너무나 현실적인 글들을 볼때마다 뭔가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과 고통이 밀려와서 애써찾아 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년전 한강 작가님의 부커상 수상소식에 힘입어 아무생각없이 <채식주의자>를 보고 너무나 깊게 주인공 감정에 동화되어 중반에 책장을 덮은 뒤로 한강작가님의 책은 아파서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그저 제 3자가 되어 멀찍이서 바라보는 그런 재질의 아픔이 아니었다. 그냥 곧장 칼날에 찔리는것 같은 책이었다. 정말 아팠던 부위, 자신의 가장 약점인 부분을 바로 곧장 찔러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노벨상 수상소식과 그것이 학교의 금지책목록에 있었고,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아픈것이 되어 그분의 책이 매번 회사의 잘 보이는곳에 "노벨상수상자 한강의 책"이라는 작은 플라스틱 안내판 아래 손때가 잔뜩 먹은 모습으로 조용히 높은 곳에 전시된 그 것을 멀찍이서 바라만 보다가 심리책이나 자기계발책이나 빌려 종종 걸음으로 지나쳐 오기에 바빴다.
그러다 무슨 용기가 생긴건지 <소년이 온다>를 빌렸다. 역시나 잔뜩 손때가 묻어 너덜해진 책을 보니 벌써부터 어쩐지 멀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볼 수 밖에 없었다. "너는" 이라는 표현이 이렇게 아플수가 있는가. 내가 한국의 소설을 보면서 너는 이라는 말에 아플수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이 "너는"이라는 2인칭 대명사를 쓴 소설이 있었던가? 너는 이라는 말때문에 도저히 덮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너는 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너와 나밖에 없는. 이건 지금 나한테 말하는 글이잖아.
동호랑 나밖에 없는 이 공간에 지금 동호가. 15살의 동호가 너무 가슴아픈 일을 결단하는데 어떻게 책장을 덮는가. 우리 딸보다 고작 5살 많은 이 중학생이 자신이 지켜야 하는게 무엇인지, 총을 받았지만 어떻게 쏘는지, 사람을 쏜 적도 쏠 생각도 없이 그저 받아든 너가 죽었는데. 정말 속이 울렁거린다.
처음 회사에 입사하고 딱 40분 주어진 밥시간에 다 같이 식탁에 마주 앉아 식판에 나온 햄버거를 먹을 때 그 토할 거 같았던 느낌이 생각났다.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그 수백개의 고깃덩이에 바른 소스를 빵에 끼워넣은걸 먹으며 수다를 떠는 인간들이 너무나 외계인 같았고 모든게 이질적이었다. 이 시간에 다 같이 햄버거를 먹는게 어떻게 이렇게 잔인하게 다가왔을까. 그 고기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다 왔는지 모르잖아. 인간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살면서 너무 많은걸 죽여왔는지도 모르겠다. 고기에 소스를 발라먹는 다는 것자체가 혐오스럽게 느껴졌고, 그것에 허기를 느끼는 나 자신이 징그러웠던 기억이 채식주의자를 보다가 생각나 책장을 덮어버린것 처럼.
소년이 온다는 매번 전시관이나 박물관을 다니며 보았던 그간의 한국 역사속의 남의 일 같던 사건들을 내 자식이, 내가, 내 친구가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 나게 해주었다. 매번 교과서로 배웠고, 심지어 수학여행때나 가족여행에 일정중에 시간이 남아서 끼워넣어져서 그저 무덤덤하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수걸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갔던 많은 박물관 공간의 이유와 그 날의 상황을 현실로 가져와 버렸다.
어쩌면 내가 조금은 남들보다 예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점에서 소설을 읽으면 심각하게 동화되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인거 같다고도 느낀다.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와 대본집을 보고 전체를 필사하고 몇 번을 되풀이해서 읽으며 주인공들의 감정속에 갇힌것 처럼, 소년이 온다를 덮어도 계속 생각나는 것은 죽어버린 혼의 혼잣말과 생각들이었다.
이러면 제사를 지내야 할 거 같잖아요 한강작가님!!!!!ㅠㅠ 저 이런거 잘 믿어요 ㅠㅠㅠㅠ아악 나 철저하게 제사기피자였는데 또 아.... ㅠㅠ 이러면 또 지내는데에 동감할 수밖에 없어요 ㅠㅠ 제발요 어쩌면 어른들이 믿고 싶은건 죽어서도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라는 생각과 너를 잊지 않았다는 마음을 진심으로 보여주기 위해 정성을 다해 그 상을 차려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결혼식보다는 장례식이 더 많아질 나이에 죽음에 가까워진 그들이 이미 죽어버린 혼에게 해 줄 수 있는, 그들을 아직도 기억해내고 있다는 표시가 아닐까. 그들의 선에게 해 줄수 있는 가장 정성스러운 것이 손수 차린 밥상과 전, 나물음식들과 공수해온 제철과일들이었을까.
가장 마지막 에필로그에 작가님의 조용히 초를 바라보며 그들을 기리는 모습이 어쩐지 우리들의 제사와 오버랩되었다. 잊지 않을게. 언제나.
책을 다 읽고나서야 책표지의 배경이 안개꽃인 것을 알아버림 ㅠㅠ 폭풍오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