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수능시험
「 제자의 수능시험 」
| 아이들의 첫 출발을 축하하며 |
이른 아침, 평소라면 울릴 일 없는 카톡 알람 소리가 들렸다. 벌써 졸업한 지 6년이나 지난 제자의 문자였다.
수능날 아침
그토록 떨리고, 챙길 것도, 되새길 것도 많았을 오늘 아침에 날 기억해준 제자를 생각하자 가슴 한 쪽이 시큰했다. ‘이렇게 중요한 날, 내가 뭐라고..’ 하는 생각에 미안하기도 했고, 한없이 고맙기도 했다.
아마 선생님이라면 누구나 졸업 후 찾아오는 제자를 맞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교직에 계셨던 나의 어머니는 수십년 전 첫 제자들로부터 아직까지도 안부 인사를 듣고 계신다. 그러니 수능날 문자 보내는 제자 한 두명이 있는 것은 그리 특별할 일도, 자랑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하루 내내 마음이 뿌듯하고, 설렜다.
내 제자가 수능을 보다니!
엄격히 따져보면 내 첫 제자들은 이미 대학생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연락이 끊어지고, 수년이 지나 대학에 갈 때까지 연락을 지속하는 학생들은 매우 드물다. 제자들이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기를 바라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머리 속에서도, 나의 기억 속에서도, 서로는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다.
간혹 졸업 후에도 꾸준하게 연락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은 담임과 제자로 만났을 때이다. 교과 전담 교사는 해당 교과 시간에만 아이들을 만나고, 여러 반을 동시에 가르치기 때문에 각 학생들과 깊이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 쉽지 않다. 반면에 1년동안 담임을 맡다보면 아무래도 함께하는 시간도 많고, 깊은 유대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안타깝게도 나는 지금까지 그런 끈끈한 사제의 정을 나눈 아이들이 많지 않았다. 핑계를 대자면 첫 발령부터 수년 동안 교과 전담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미국에서 돌아와 복직한 후에야 처음으로 담임을 맡았다.)
누가 어느 학년의 담임을 맡고, 교과 전담 교사를 할 것인지를 정하기 위해 선생님들은 학년 말에 1, 2, 3지망까지 자신이 원하는 학년 및 교과를 적어서 제출하게 된다.(학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당시 관리자(교장, 교감)의 성향 및 ’어린 신규’ 라는 내 상황 때문에 의사와 상관 없이 언제나 영어 교과 전담을 맡았다.
어느 해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모두가 기피하는 6학년 담임을 1지망에 썼다. 그렇게 해서라도 더 늦기 전에 담임을 하고 싶었으나, 그 해에도 나에겐 또 영어교과가 주어졌다. 방학 중 영어캠프와 영어 연극, 영어 노래, 영어 말하기 등 10개 이상의 교내 대회, 영어 오페라 등 각종 외부 공연, 게다가 원어민 교사 관리까지 맡아야 하는 우리 학교의 영어 전담을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대회와 활동을 통해 배운 것도 많았고, 수업 연구를 많이 할 수 있어 좋은 점도 있었지만 아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아쉬움이 남았다.
나는 ’영어’ 선생님 이 아니라,
’우리’ 선생님 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절하기도 했지만, 허락하는 한 아이들에게 다가가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가끔은 신규교사의 열정과 무지로 담임 선생님이나 할 만한 상담이나 훈육같은 주제 넘은 짓을 하기도 했다. 그 때 만난 아이들이 이번에 수능을 본 제자들이다.
5학년 때 처음 만난 그 녀석들은 ‘말썽꾸러기’ 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여학생들이었다. 욕을 서슴없이 입에 담고, 수업도 안 듣고, 학교에서 싫어할 만한 행동들로 6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은 많이 힘들었다며 지금도 고개를 절레 절레 젓는다.
그런 아이들이 신기하게도 나와는 참 잘 맞았다.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 잘 들어주었고, 심지어 하지 않던 영어 공부도 하기 시작했다. 초짜였던 내가 능숙하게 아이들을 구슬렸을 리도 없고, 수업 능력이 출중했다고 말하기엔 스스로 염치가 없다. 추측하건데 그 아이들과 내가 그토록 가까워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담임을 맡지 못한 초짜 교사의 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
담임을 못 하니 어떻게든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쉬는 시간, 수업 시간 할 것 없이 들이대고, 또 들이대고.. 그렇게 조금씩 친해진 아이들은 어느새 나를 ‘담임 선생님보다 가까운 영어 선생님’으로 생각해주었다.
아이들이 손수 만들어 줬던 결혼식 축하 케이크.
송데렐라….. 는 당시 시간을 묻는 영어 표현 수업 중 신데렐라 몸에 내 얼굴을 합성한 사진자료를 사용하며 생긴 별명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수업 중에 별 짓 다 했구나 싶다..)
내가 미국에 간 뒤에도 중학생이 된 아이들은 간간히 소식을 전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만났다. 내가 기억하는 12살, 5학년의 아이들이 아니라 쑥 자라버린 모습에 감회와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든 학교 생활 중에도 맑고 건강한 웃음을 지켜낸 아이들이 자랑스러웠다.
올 해 스승의 날에도 찾아와 고3이라며 한참 신세 한탄을 늘어놓고 갔었다. 장난스레 이야기했지만 그 속에 불안과 걱정이 보였다. 대학 가면 살 빠진다는 말은 거짓말이니 적당히 먹으며 컨디션 관리하라는 농담같은 조언을 하기도 했지만,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은 수능이 너희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중요한 시험이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도 또 문자가 왔다. 요 녀석들 자유를 만끽 중이다. 마음 놓고 놀라고 하고 싶었지만 역시 마지막에 늦은 밤길은 조심하라는 선생님 단골 문장을 써버렸다.
그리고 오늘 아이들은 수능을 보았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문자가 도착했다.
이제 끝났다며, 드디어 자유라고 말하면서도 벌써 결과를 걱정하고, 내년을 두려워하는 너. 나 또한 그랬고, 아마 오늘 시험을 본 다른 학생들도 이런 마음일거라 생각하니 슬프고, 안타까웠다.
시험을 끝낸 오늘 하루만이라도 진짜 자유롭게 놀고, 쉬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다. 수능을 본 학생들도, 함께 가슴을 졸였을 가족들도 오늘 밤만큼은 푹 쉴 수 있기를. 조만간 만나면 수고했다고, 힘차게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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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아이들 너무 기특하고 대견스러우시겠어요. :)
만나면 맛있는 거 사주셔야겠네요. :D
선생님이셨군요. ㅎㅎㅎ
영어 선생님이 아닌 우리 선생님이 되고 싶으셨단 말이 지금의 송블리님의 '우리'제자들을 있게한 것 같아요 : )
아, 저 마장호수 다녀왔어요 ㅎㅎㅎ
우와! 완전 가슴 뭉클 하셨을거 같아요 ㅠ.ㅠ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참 뿌듯하시겠어요. 유독 나와 코드가 잘 맞는 제자들이 있죠. 그런 제자를 만난다는 건 선생님 입장에서도 큰 행운인 거 같아요. ^^
와우~ 학생들이 이렇게~ 정말 멋진 선생님이셨군요~
저도 이런 멋진 선생님 아래에서 공부했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요~
뿌듯하셨겠네요.. 학교도 요즘 삭막해지는 얘기가 많은데 따뜻한 미담입니다..
멋진 선생님!^^
초등학생 제자가 수능을 본다니...
뿌듯한 마음 제대로 느끼셨겠네요~
그나저나 송데렐라 넘 귀여운 별명을 가지셨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