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센 콩국수

in #kr6 years ago (edited)

18년 전.... 이렇게 덥던 어느 여름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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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동 4.19 묘지에서 쭈욱 내려오다보면 덕성여대 가는 작은 사거리가 있죠. 그 모퉁이에 나폴레옹인가 하는 과자점이 있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잘) 그 옆으로 난 아주 좁고 짧은 골목길 끝에 한 식당이 숨어 있었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식당같지도 않은 곳이죠. 가정집 앞에다가 70년대식 입간판 하나 세워 놓은 것이니까.

그곳은 70 가까운 노부부 두 분이 운영하고 계셨는데 칼국수 보쌈에 만두국을 손님들에게 내고 여름에는 콩국수도 곁들이는 곳이었습니다. 그 노부부 가운데 바깥 양반... 부리부리한 눈매에 입술 양쪽이 아래를 조금 처지는 것이 '나 고집 세다'를 얼굴에 써놓은 경상도 할아버지였죠.

"이 골목에 대체 어떤 사람들이 알고 찾아와요?"라는 인터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모르는 사람은 옆집에서 10년을 살아도 모르고, 아는 사람은 제 발로 찾아오고............."

그러고 있는데 한 손님이 찾아들었습니다. 원래 이집은 이른바 뜨내기 손님이 없습니다. 머리카락 보일까 꼭꼭 숨은 이 식당이니 어련하겠습니까. 헌데 이 가게를 처음 들어선 듯한 티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뜨내기 손님은 할아버지와 비슷하게 나이를 먹은 할머니였습니다. 헌데 첫마디의 억양이 그 출신을 즉각 드러나더군요.

"국수 팝니까? 찬 국수요..."

그 독특한 하지만 이제는 귀에 익은 연변 말투였지요. 뜻하지않은 뜨내기손님의 출현에 할아버지도 뜨악합니다.

"우리는 찬 국수라면 콩국수인데...."
"콩국수? 그게 뭐입니까? 냉면하고는 다른 거입니까?"
"냉면 우리는 안해요. 콩국수 안먹어 봤어요?"

할아버지 이때까지 경상도틱한 무뚝뚝이었습니다. 헌데 제가 그림을 만들어 보려고 할아버지한테 이렇게 귀엣말을 했을 때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아버님. 저 할머니 중국에서 오신 것 같은데 콩국수값 제가 낼 테니까 한 번 돈 받지 말아 보셔요. 촬영을 위해서요.."
사실 이 정도 상황설정은 식당 촬영할 때 한 번씩 써먹던 겁니다. 그래서 종종 제가 식당 주인한테 대신 돈 낸적 많죠. 손님이 고마와하고 주인은 인심쓰는 척하고, 그렇게 물흐르듯 가면 되거든요.

헌데 이 할아버지 갑자기 뭐에 맞은 듯한 표정입니다. "아하.. 맞다 아하 맞다.."를 연방 토해내더니 예상치 못한 발언을 합니다. " 당신 말이 맞다. 내 오늘 사람 노릇 못할 뻔 했다. 나는 그냥 웬 뜨내기고..하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내 장사하는 동안 사람 완전히 베려 부렸구만. 맞다... 아하 맞다.."

이거 또 불안해집니다. 웬 오버? 고향은 연길이고, 지금 한국에서 어린애 봐 주는 일로 직업을 삼고 있다는 연변 할머니가 평생 처음 먹어 본다는 콩국수를 맛있게 드신 후에 꼬깃꼬깃 돈을 내밀었을 때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우렁차게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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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마이. 그냥 가이소. 오늘은 내가 대접할께."
"아니오.. 무슨 말씀을... 여기 있슴다."
"허허 아이라카이... 오늘 콩국수 첨 먹었다카이 내 기분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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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할머니가 머리를 깊게 숙이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나가 주면 PD의 연출 의도와 맞아 떨어지는데 이 할머니도 보통 할머니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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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태어나서 지금꺼징 공짜 밥 먹은 적 없슴다. 받아 주세요."
"아따 할마이 참말로... 그냥 가라카이."
두 분다 정색을 합니다. 할머니는 기필코 돈을 내겠다는 것이고 할아버지는 그 돈 받으면 큰일난다는 듯 손사래를 칩니다.
"이 돈 낼만큼은 나도 돈 법니다."
"나도 할마이 돈 안받아도 먹고 살만큼은 벌어요." 경상도 할아버지답게 금방 언성이 높아집니다. 내가 들을 때 할머니가 기분 나쁠 정도로 말입니다. 잘못하면 분위기 이상해지겠다 싶어 할아버지 옆구리를 찔렀지요. "너무 무리하게 하시지는 마세요." 그러자마자 할아버지 내게 호통을 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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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PD 양반. 내가 지금 당신 촬영하라고 내 이러는 줄 알아. 사람을 뭘로 보고 이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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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로서 젤 무능해 보이는 순간은 아무런 개입도 못하고 눈앞에서 일어나는 장면들에 카메라만 왔다갔다 하는 때죠. 두 노인의 실랑이는 끝없이 계속됐습니다. 나중엔 할아버지가 주방으로 도망가버립니다. 할머니가 옳다구나 싶어 테이블 위에 돈을 내려놓고 나가려 하자 이번엔 부엌에서 일하던 할머니가 득달같이 달려옵니다. "빨리 가라 카이 뭐하능교." 싸움은 연변 할머니가 "난 밥 얻어먹는 거 싫습니다."라고 자존심을 내세우자 경상도 할아버지도 목소리를 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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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할마이가 불쌍해 보여서 내 이라는 거 아니요. 보아하니 내하고 동갑뻘인데 우리 또래 참 힘들게 살았잖아. 할마이는 또 고향 떠나와서 고생하잖아. 우리도 아직 일 못놓고 장사하잖아. 동갑내기 친구한테 밥 한 그릇 대접하겠다는데 그기 그리 고깝소?"
"그래도..... "
"그래도는 뭐가 그래도야. 지금 할마이 내를 뭘로 보고 이러는 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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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할머니의 눈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돈을 그냥 쥔채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섰습니다. 할아버지 는 계속 씩씩거리면서 뭐라뭐라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그걸 들으면서 할머니의 굳은 얼굴이 펴지는 것을 봅니다. 나이 일흔에 조국은 조국이되 만리타국보다 못한 조국을 찾아와서 친손주도 외손주도 아닌 남의 손주를 보면서 돈 50만원 받고 있는 한 할머니, 사소한 호의에도 자기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민감함으로 날이 서 있던 할머니의 태도가 그제야 누그러지는 것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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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할아버지가 이겼습니다. 몇 번이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를 되풀이하던 할머니는 결국 돈을 치마 주머니에 되돌리고 식당에 들어올 때의 그 쭈뼛함 대신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 밖으로 나섰습니다. 그때 할머니의 그렁그렁해진 눈망울과 뭔가가 치오르는 것을 억지로 누르는 듯 꿈틀대던 입술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켠이 짠해 옵니다. 할아버지는 그때 할머니에게 당신의 지갑을 여는 대신 마음을 열어 달라고 그렇게 승강이를 벌였고, 결국 그 진심이 할머니에게 전달된 셈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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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이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광경을 눈 앞에서 지켜보았던 그날의 오후는 제게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기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다시 그 식당을 들렀을 때 저는 그 할머니가 다시 오신 일이 있는가를 여쭈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할아버지도 그 할머니를 꽤 기다렸다지요. 언제 다시 오면 보쌈이라도 대접하려고 그랬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 뒤로 한 번도 그 할머니는 오시지 않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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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또 세월이 한참 흘렀습니다. 식당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연변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실까도 확실치 않은 훌쩍 가 버렸네요. 하지만 누군가 콩국수 얘기를 하자 그날의 할아버지 목청과 연변 할머니의 젖은 눈매가, 때아닌 된장찌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기세로 뇌리를 채워 옵니다. 참 기억에 남는 콩국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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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국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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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국물처럼 진한 감동이네요 ~~

어릴적 광산사거리 살아서요 ㅎㅎ 음식하나에 굉장히 잊혀지지 안을 사연이네요... 아이구 할베요ㅋㅋㅋ~~

그냥 보기만 해도 너무 시원하니 맛나 보여요

우동 한 그릇이라는 소설이 생각나네요! 저한테는 그저 맛있기만 한 음식이 누군가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ㅎㅎㅎㅎ 자주 올게요! 소통해요!!팔로우하고갑니다!

더울때는 콩 국수만 한게 없지요.....

사연있는 콩국수라서 콩국수먹을때 마다 추억이 생각나실거 같네요.
그럼 더 맛있을거 같아요

pd이신가보네요. 읽다보니 왠지 짠해지는 콩국수네요.

콩국수 한그릇에
진한 추억이 있으시군요...
정독했네요...

글이 너무 잼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