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개 이야기
(▲ 갑순이. 동생 말을 잘 안들었고 걷기를 싫어했다.)
첫 번째 개는 갑순이였다. 암컷 잡종 갈색. 이발소에서 5천원주고 사 왔다. 선천적으로 발바닥이 약해 잘 걷지 못했다. 그런지도 모르고 꼬마였던 내 동생은 자기랑 산책 가는 걸 싫어한다고 여겨, 갑순이 목줄을 세게 집어 당기곤 했다. 한 살이 좀 넘어서, 동네 발바리 수컷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맞아 임신을 했다. 몸을 잘못 놀렸다고 아비에게 두들겨 맞았다.
갑순이는 추운 겨울 날, 새끼 두 마리를 낳고 가버렸다. 화장실이 밖에 있는 집이었는데, 아침에 조금 큰 꼬마였던 내가 식어있는 갑순이를 발견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새끼 이름을 나와 동생의 막 글자를 따서 갑선이 갑빈이로 지었는데, 며칠 뒤에 같이 가버렸다. 수의사가 근처에 잘 없던 시절이었다(사실 데려갔어도 살릴 돈이 없었을 게다). 애견용 우유 이런 것도 구할 수 없었다. 자주 다니던 집 근처 논밭에 모종삽으로 어미 곁에 파 묻어줬다.
(▲ 갑돌이. 왼쪽은 동생. 오른쪽 내 품에 안긴 새까만 강아지가 갑돌이다)
두 번째 개는 갑돌이였다. 수컷 잡종 검정색에 군데군데 갈색 털이 섞여있었다. 큰고모에게 새끼 때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갑순이와 달리 지나치게 활동적이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활동적이고 지랄 맞은 성격이었다. 아무나 보고 짖었다. 가족도 가끔 못 알아보고 일단 짖고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산책을 너무 좋아했고 목줄을 싫어했다. 그 당시 우리 집과 김포공항 근처 사이에는 너른 논이 큼직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자주 산책 갔다.
그러나 1년 정도 뒤에 산책을 좋아하던 갑돌이는 산책하다 죽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외가 완도에 한 두어 달 살았는데, 그곳에서 아비의 편지를 받았다. 한글을 못 읽어 막내 이모가 대신 읽어줬다. "차와 벼락을 조심하거라. 갑돌이는 산책 갔다 차에 치여 죽었다. 논에 묻었다. 이상" 그때의 나는 가족을 잃었다는 상실감을 느끼기엔 너무 어렸다. 외할머니가 우리 손주 새끼 강아지를 하나 가지고 돌아가라고 했다. 여섯 마리의 강아지 중에 막내 점박이를 데려 갈랬는데, 주변에서 다리를 저는 강아지라며 다른 걸 고르라 했다. 한 마리를 고르고는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세 번째 개는 완돌이었다. 완도에서 가져온 수컷이라 완돌이었다. 마찬가지로 발바리였다. 털색은 순백색이었다. 사실 나는 암컷을 가져왔는데, 집에 와보니까 완돌이로 바꿔치기 당했다. 엄마가 몰래 전화로 암컷은 발정기가 감당이 안 되니 수컷을 달라고 밀실 협의를 했다 들었다. 똥개 새끼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웠고 금방 컸고 못나졌다. 이내 내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그땐 개보다 학교 친구들이 더 좋은 초등학생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개가 사라졌다. 완돌이도 갑돌이처럼 활동적이었다. 특히 목줄을 풀어놓으면 알아서 동네 한 바퀴 시찰하고 밥과 물이 고플 쯤 돌아오는 걸 즐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줄을 풀어 산책시킨 완돌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오지 못했을 거다. 복날이 있는 주였고, 아비의 실수였다. 집 뒤에 노인정이 있었다. 복날에 할배들이 흰 개를 잡아먹었다고 들었다. 익숙한 흰 털뭉치가 경로당 근처 수풀에 보였다. 대판 치고받고 싸웠던 거로 기억한다. 목줄 달린 주인 있는 애완견을 몰래 잡아다 먹는 경우가 어디 있을까? 염치가 없고 뻔뻔했고 완돌이는 잡아먹혔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최초로 ‘노인’이라는 사람들에게 실망했다. 교과서에는 남의 집개를 잡아먹어 보신하는 노인은 안 쓰여 있었다.
(▲ 바둑이. 정말 영특했다. 북술거리는 털이 매력 포인트였다)
네 번째 개는 바둑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김포 오일장에서 오토바이로 새끼 때 데려왔다. 장에서 신발장 칸칸이 강아지 새끼들을 올려두고 마리당 오천 원에 팔았다. 하얀 똥개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웬걸? 웬 바둑무늬 강아지가 자꾸 나를 보고 꼬랑지를 세차게 흔들며 안기고, 깡총 뛰며 품에 앵기는 게 아닌가? 얘다 싶어 바로 안아왔다. 암컷 잡종, 갈색 베이스에 흰털이 종종 얼룩져있었다.
굉장히 예쁜 개였다. 필름 카메라로 찍은 바둑이의 새끼 때 사진을 난 늘 구깃하게 들고 다녔다. 근처 족발집에서 남은 것들을 봉다리에 모아주면 특식이라 생각하고 특히 잘 먹었던 기억이 있다. 광견병 백신도 사 맞추고 밥도 잘 챙겼다. 영특한 개였다. 사람을 잘 외워 이웃은 짖지 않았다. 수상한 사람은 기가 막히게 골라 짖었다. 앉아있으면 꼭 내 맨발을 핥는 이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쥐를 잘 잡았고, 나와의 산책을 좋아했다. 논밭 저수지를 보면 나에게 자꾸 던져달라고 했다. 나는 힘껏 던지고 곧바로 웃통을 벗고 물에 따라 들어갔다. 다 젖은 꼴로 오면 엄마의 등짝세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어 대 맞고 바둑이와 함께 목욕했다.
초등학생 때 만난 바둑이는 중학생이 되고 곧 이별했다. 전셋집에서 나가야 했다. 우리 집 재산으론 마당 있는 집에 더는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윗집 할머니 시골에 보냈다. 유독 큰 사랑을 줬던 개였다. 엉엉 울었고 늘 아쉬웠고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했다. 그리고 바둑이 소식을 일이 년 더 듣고 연이 끊겼다. 그때가 벌써 10년이 더 된 세월이니 아마 하늘에 있을 게다. 그 이후로 어떻게 살았는지 잡아먹히진 않았는지 별 무리 없이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는지 궁금하고 또 미안하다.
다섯 번째 개는 아리였다. 순종 말티즈 암컷. 처음으로 실내견을 키우게 되었다. 중학생 때 아비가 어디서 얻어온 걸로 기억한다. 사료를 먹인 최초의 개였다. 다른 개들은 사람 먹다 남은 음식을 끓여서 개죽을 주곤 했었는데, 얘는 사료를 먹는 횡재를 했다. 개라면 똥개 밖에 모르던 내가 ‘순종’이라는 이름값에 홀렸다. 예쁘고 귀티가 났고 윤기가 흘렀다. 아리는 평범했다. 조용했고 똥오줌을 잘 가렸다. 한창 개를 키우는 친구와 공원으로 산책을 자주 다녔다. 아리는 1년 반 정도 키우다가 또 남을 줘야했다.
이사 때문인 건지 경제상황 때문인 건지 부부싸움의 여파인건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 뒤로 끝까지 키우지 못할 개면 애초에 만나지 않았을 편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게 서로를 위해서 좋은 게 아니었을까. 아리를 넘겨준 집은 밖에 묶어 키우고 미용도 안했다. 오랜만에 본 부드러운 흰털의 아리는 거무튀튀한 한 마리 삽사리가 되어 있었다. 나를 알아본다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는데,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다. 좀 잘사는 집에서 좋은 주인 만나서 깨끗하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팔자였을 텐데.
여섯 번째 개는 루키였다. 빠삐용 믹스견 수컷, 중학교 3학년 때 얘도 아비가 어디서 얻어왔다. 사춘기였던 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루키를 동일시했다. 루키는 나와 아버지 사이의 기 싸움과 기울어지는 가세와 어머니의 고생에 휘말린 불행한 개였다. 하필이면 루키는 멍청했고 잘 짖었고 아무나 잘 물었고 똥오줌을 심각하게 못 가렸다. 개를 얻어다만 놨지, 사룟값이건 똥오줌이건 한 번을 치우지 않았다. 그것은 늘 나와 동생, 아니면 어머니의 몫이었다. 집안의 불쌍한 인민들이 방구석 독재자에게 불만을 말할 수 없었으니, 나머지 식구들의 눈치는 오로지 루키가 받아야 했다. 하도 짖어서 민원도 자주 들어왔었다. 나는 없는 살림에 팔자 좋게 돈 한 푼 안 주고 개나 키운다고 자주 대들었다. 물론 영영 안 볼 사이가 된 지금도 정당한 분노였다고 생각하지만, 고래 싸움에 딱밤이나 맞던 루키가 너무나도 딱했다.
루키는 나와 주말이면 작동산이나 까치울산, 은데미산으로 산책을 자주 다녔는데 비쩍 꼴아서 지나가던 애견인들이 나를 혼냈다. 밥 좀 먹이라고. 루키는 열흘을 주린 듯 허겁지겁 먹고, 소화기관에 문제가 있을 정도로 많이 싸는 개였다. 눈칫밥을 먹으니 살이 찔 리가 있나. 결국, 루키는 회사 경비견으로 보냈다. 김포의 너른 공장에 경비용으로 잘 짖는 개가 필요하대서 넘겼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넓은 공터에 목줄도 안 하고 마음껏 뛰어다니면서 짖고 싶은 만큼 짖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들었다. 공장 아저씨들이 인심 좋게 넉넉히 사료와 먹거리를 던져줬고 아무데나 똥오줌을 싸도 상관없는 곳이라고 했다. 우리 집은 루키에게 지옥이었을 거다. 미안하다 너를 막 대해서.
나는 개를 끝까지 키워본 적이 없다. 6번 만나 8번 이별했다. 어떤 개는 애를 낳다 죽었고, 교통사고로 죽었으며, 또는 잡아먹혔다. 죽지 못한 개들은 자꾸 집 넘어 너머로 주인과 가족을 바꿔야 했다. 개를 키우지 않은지 10년이 지났다. 부산의 온천천이건 부천의 대공원이건 주인과 행복하게 걷는 개들을 볼 때마다 참 나는 못난 주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개죽이나 끓였지 번번이 사료니 개껌이니 하는 것들도 제대로 주지 못했다. 변변한 개집도 없이, 대충 나무판자를 담요와 적당히 둘러 엮은 허름한 궤짝에다 목줄 묶어 키웠다. 자유롭지도 만족스럽지도 안락하지도 못했을 게다. 그럼에도 나의 개들은 늘 나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주인으로 생각해주고 반겨줬다. 개죽을 먹으면서도 꼬리 춤을 멈추지 않는 너희처럼, 나는 내 라면 국물에 뭉친 개털을 보고도 늘 웃음이 났다.
스물여섯. 어느 정도 내 앞가림을 시작해 개껌도 사료도 장난감도 사줄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제는 개를 키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잘해주지 못할 것 같아서, 끝까지 함께하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이제 와서 새로 만난 친구에게 잘해주면 그동안 못 해준 너희들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아서. 그래서 개에 대한 나의 묘사는 늘 과거형이다. 사족이 길었다. 딱 한 마디 더. 나는 너희를 정말 좋아했다. 너희가 이따금 나 한번 생각해줬음하고 바라는 건 내 욕심이겠지. 너희 8마리의 삶을 내가 이렇게 짧게 담아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만한다. 안녕 나의 개들에게. 친구에게. 휘몰아치던 꼬랑지를 기억하며.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2017년 8월 26일 @PrismMaker
글에 느껴지는 감성이 참좋네요.
새벽에 읽기 좋은 글이에요.,.
저도 휴대폰 케이스에 묻은 고양이 털만 봐도 웃음이 나올때가 있어요.
같이 사는 애완동물들은 사람에게
사랑만 주고 떠나서
한없이 미안해지나봐요..
사랑만 주고 떠나서 한없이 미안해진다.. 본 글보다 훌륭한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