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17] 주말에 산이나 갈까?
주말에 산이나 갈까?
미리 밝혀두자면, 이 이야기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에 관한 것이다. 특별한 사건도 없었고, 누군가가 죽거나 다치지도 않았다. 사랑과 이별의 로맨스도 없고, 그저 깊은 숲을 걸었던 우리의 무료했던 주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래,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 누구도 피를 쏟지 않았다.
9년 전, 미국에서 지내던 때의 일이다. 너무도 무료했던 한 주가 끝나갈 무렵,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주말의 작은 트래킹을 계획했다. 시애틀의 우기가 끝나고 화창한 5월이 왔는데, 이대로 주말을 보내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산에는 말야, 쿠거가 산대.
퓨마, 펜서를 이 지역 사람들은 쿠거라고 부른다고 한다. 블랙펜서같이 검은 쿠거도 있었을까? 산을 오르기 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쿠거를 보고 싶었다. 산 이름이 쿠거 마운틴이었으니, 어련히도 많이 살고 있나보다고 생각하면서, 두려움과 기대감을 동시에 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산을 올랐다. 쿠거를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보통은 인기척을 느끼면 쿠거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떠난다고 하며, 동행은 내게 안심하라고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쿠거가 보고 싶은건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숨이 턱까지 차오르자 온 세상이 나의 호흡 소리로 가득찬다. 싱그럽던 바람 소리도, 오를 맞춰 부지런히 움직이는 우리의 발자국 소리도 모두 흡 하 숨소리에 묻힌다. 그리고 어느샌가, 시선의 끝에 호수가 담긴다. 선두에 섰던 형이 자랑스러운 미소로 말한다. 그래, 이걸 보여주고 싶었어.
고요한 호수를 둘러가며, 우리는 속도를 늦추고 수면에 부서지는 햇살에 흠뻑 젖는다. 문득 쿠거가 이 곳 어딘가에서 물을 마시다 우리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몸을 낮추고 있지는 않을지 상상해본다. 어딘가, 이 호숫가의 한 구석에서 풀숲에 몸을 납작 엎드리고 날카로운 두 눈으로 우리의 발목을 노려보고 있지는 않을까. 정말 어쩌면, 우리 모두 호수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 날카로운 발톱으로 대지를 박차고 올라 우리의 등에 올라타고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은 아닐까.
모험의 길이라는 다소 유치한 이름의 길을 지나, 우리는 풀숲 사이로 도로가 펼쳐진 곳에 다다랐다. 어느새 정상을 지나 하산길에 접어든 것이다. 이 앞으로는 아름다운 호수도 없고, 윤기가 흐르는 털을 가진 쿠거가 나올 가능성도 희박하다. 다소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늘 그렇듯 하산길은 순탄하다. 거칠었던 호흡은 어느새 안정되어가고, 오를때와 다르게 내리는 길은 시야가 트인다. 더 멀리, 더 넓게, 한 눈에 담는 풍경이 사뭇 다르다.
결국 쿠거는 만나지 못했다. 그저 온 몸으로 숲을 헤엄치고, 햇살이 부서지는 호수를 만났을 뿐이다.
트레일의 끝자락에서 차에 몸을 싣는다. 뒷통수에 누군가의 시선이 꽂힌다. 깊은 숲이 시작되는 그 경계지점에서, 멀어지는 우리의 모습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비단결처럼 고운 털을 가진 흑색 쿠거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숨을 죽이고, 우리의 뒤를 밟으며 목덜미를 뜯을 타이밍을 재며 두툼한 발을 조심스럽게 내딪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목덜미는 무사하고, 우리는 누구도 피를 쏟지 않았다.
무료했던 한 주가 끝난 어느 주말. 우리는 산을 뒤로 한 채 푹신한 침대가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하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흥미로운 글 잘 읽었어요. 온통 흡.. 하... 소리만 들리는 산행길... 그시절을 소환하는듯 했습니다
요즘은 체력이 더 떨어져서 다시 간다면 이번에는 기어올라가야 할듯 합니다ㅎㅎㅎ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무료했던 주말.. 잘 읽었습니다.
시간날 때, 산에나 가야겠네요 ㅎ
산에는 산 만의 매력이 있지요^^ 저도 오랜만에 산에 가고 싶어지네요. 가까운 작은 산에라도 다녀와야할까봐요~!
같이 등산하는 기분이였어요 ㅎㅎ 사진 하나하나가 생동감 넘쳐서 그런가봐요 !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등산가고 싶어지네요ㅎㅎㅎ
너무 안심시키고 시작하셔서 아무일도 없을 줄 알았습니당...ㅎㅎ
제가 너무 긴장감 없이 만들어버렸나요?ㅎㅎㅎ 하긴 무슨 일이 있었다면 제가 지금 이 글을 쓸 수가 없었겠죠^^
한편의 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이네요 ~
글 솜씨가 역시 넘 좋으세요 ㅋㅋ 빠져들었담 ㅎㅎ
사진들도 다 너무 예쁘네요
뭔가 쿠거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읽으니, 숲이 신비로워보여요
노아님의 감수성이 풍부하고 말랑말랑하셔서 그런지도요..?^^ 노아님 말씀을 듣고나니 요런 느낌으로 단편 소설을 하나 써봐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중에 한 번 도전해볼까요?ㅎㅎ
짱짱맨 호출로 왔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