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서사의 위기


이미지 출처 : 네이버 글감 검색

저자 : 한병철

독일에서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고, 베를린 예술대학교 철학/문화학 교수를 지냈다.

대표작 <피로사회>




"방향도 없고, 의미도 사라지고 깊은 허무에 빠진 현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

빠르게 사라지는 뉴스라는 스토리를 좇느라 방향도, 의미도 잃은 채 불안해하는 현대인의 삶을 '서사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억압도, 저항도 없이 스마트한 이 지배체계에서 우리는 삶을 게시하고 공유하고 좋아하도록 지배당한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잃은 사회, 내 생각, 느낌,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입력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사회의 끝은 서사 없는 '텅 빈 삶'이다.




앞서 읽었던 책 <피로사회>에서도 많이 느꼈지만, 이 분의 글은 내가 읽기에 너무 난해하고 어렵다.

앞으로 내가 이 분의 책을 골라서 읽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할 것이다.

서사의 위기, 책에서 말하는 요지는 이거 하나인 건 알겠다.

'현대 사회는 '이야기'가 사라졌다.'

스마트폰 속 SNS에 의해 지배 당하는 한 편, 긴 글을 읽거나, 긴 영상을 시청하기 힘들어하는 현대 사회를 꼬집는 내용.





아래부터는 책을 읽으며 기록해 둔 본문의 문장들 중 일부



업데이트 강박에 시달리는 정보 사냥꾼은 지식보다 정보에, 공동체보다 커뮤니티에, 공감보다 정보 교환에 빠져들며 파편적인 스토리를 무한히 재생산한다.




더 이상 멀리서 오는 지식이 아닌, 바로 다음에 일어날 일의 단서를 제공하는 정보만이 공감을 얻는다. - 발터 벤야민

근대의 신문 독자들은 시선을 멀리 두고 머무르는 대신, 하나의 뉴스거리에서 다른 뉴스거리로 관심을 이동시킬 뿐이다.




스마트한 지배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의견, 필요, 선호를 소통하라고, 삶을 서술하라고, 게시하라고, 공유하라고, 링크로 걸라고 요구한다.

이때 자유는 억압되기는커녕 철저히 혹사된다.

자유가 결국 통제와 제어로 전복되는 것이다.

스마트한 지배는 그 존재를 특별히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매우 효율적이다.

이들은 자유와 소통의 탈 속에서 숨어 있다.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를 거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의 흐름에 예속시킨다.




현시점에서 다음 현시점으로, 하나의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하나의 문제에서 다음 문제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다니는 삶은 생존을 위해 마비된다.

문제 풀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서사'만이 비로소 우리로 하여금 '희망'하게 함으로써 미래를 열어준다.




정보는 놀라움의 자극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정보는 시간을 파편화한다. 주의도 파편화한다.

정보는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스냅챗은 디지털로 이루어지는 찰나의 소통을 몸소 보여준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디지털 플랫폼의 '스토리'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떠한 '서사적 길이'도 보이지 않는다.

일련의 순간 포착일 뿐이며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들은 빠르게 사라지는 '시각적 정보'에 불과하다.

셀카도 '찰나의 사진'이다.

기억 매체로서의 아날로그 사진과 달리 셀카는 일시적 시각 정보다.

(...)이들은 기억을 위해서가 아닌, 소통을 위해 사용된다.

궁극적으로 운명과 역사가 담긴 인류의, 종말을 예고한다.




디지털 플랫폼의 기술적 장치는 '전체 삶의 기록화'에 쓰인다.

즉, 삶 자체를 모두 데이터 기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데이터가 많이 모일수록 그 사람에 대한 감시와 제어는 더 잘 이루어지고 경제적으로도 더 잘 착취된다.

자신이 그저 노는 중일 뿐이라고만 믿는 포노 사피엔스는 실제로는 완전히 착취당하고 제어당하고 있는 것이다.

놀이터로서의 스마트폰은 '디지털 파놉티콘'임이 드러났다.




무조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거나 또는 무조건 '최적화'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삶은 생존, 즉 살아남기의 삶이다.

건강과 최적화를 향한 히스테리는 벌거벗고 의미가 제거된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최적화는 기능 아니면 효율에만 해당하는 프로세스다.

이야기는 내재적 가치를 지녔으므로 최적화가 불가능하다.




세계가 탈신비화되면 모든 세계관계가 인과성으로 축소된다.

그러나 인과성은 여러 관계성 형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

모든 것을 인과성으로 설명하는 전체화는 '세계 빈곤'과 '경험 빈곤'을 초래하다.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 정보와 반대된다.

이야기는 완결성이 특징이다. 즉 종결형식이다.

이야기는 결말, 완결, 결론을 지향하고, 정보는 본질적으로 항상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고, 파편적이라는 점이다.




빅데이터는 사실상 설명하는 것이 없다.

빅데이터에서는 사물들 사이의 '상관관계'만이 파악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관관계는 지식의 가장 원시적인 형식이다.

상관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은 없다.

빅데이터는 사물이 '왜' 그렇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인과적 맥락도, 개념적 맥락도 생성되지 않는다.

'어째서'가 '개념이 결여된 그것이 그렇다'로 완전히 대체된다.




모든 슬픔은 이야기에 담거나 이야기로 해낼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 - 한나 아렌트




모모가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했는데, 그건 바로 '듣기'였다.

일부 독자들은 그게 전혀 특별하지 않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착각이다.

경청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모모의 우호적이고도 사려 깊은 침묵은 상대를 자기 혼자서는 절대 도달할 수 없었을 생각으로 데려간다.

경청은 수동적인 상태가 아닌 능동적인 행위다.

경청은 상대에게 이야기할 영감을 주고, 이야기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소중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심지어 사랑받는다고까지 느끼는 공명의 공간을 연다.




오늘날 우리는 접촉이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 스마트폰은 타자에게서 타자성을 빼앗기도 하고 타자를 소비 가능한 대상으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커져가는 접촉의 빈곤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 접촉의 빈곤은 결국 세계 빈곤으로 이어진다.

접촉의 빈곤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외롭고, 불안하게 만든다.

디지털화는 이러한 접촉의 결핍과 세계 빈곤을 계속해서 악화시킨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고립시키는 것은 늘어가는 연결성이다.

여기에 바로 파멸적인 네트워킹의 변증법이 존재한다.

네트워킹되어 있다는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이야기와 달리, 친밀감도, 공감도 불어내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시각적으로 장식된 정보, 짧게 인식된 뒤에 다시 사라져 버리는 정보다.

이들은 이야기하지 않고 '광고'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 시대에 이야기와 광고는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서사의 위기다.




오늘날의 정보사회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과도하게 소통한다.

우리는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를 건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이야기 공동체가 아닌, 소비사회를 형성한다.

스토리텔링은 마케팅에서 활용된다.

자기 자체로는 가치 없는 사물을 가치 있는 재화로 변화시킨다.

(...)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사람들은 사물 자체보다 서사를 더 많이 소비한다.

서사의 내용이 실제 사용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

(...)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된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 중독 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



202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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