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몰기(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 한국인 첫번째 파일럿!

in Korea • 한국 • KR • KO2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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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21.. 한국이 만든 전투기의 첫 비행을 보며 얼마나 자부심이 느껴지든지요.
최근 말레이시아가 FA-50 공격기 18대를 구매 했다는 소식도 있었지요.

그래서 오늘은 한국의 첫 번째 파일럿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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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람은 한국의 첫 번째 파일럿 안창남이다.

1917년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우월한 인간임을 강조하기 위해 경성과, 평양, 부산으로 에어쇼를 개최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사람이 하늘을 난다는 소문을 듣고 여의도 비행장에 5만이 넘는 인파가 몰리게 된다. 비행기 굉음에 압도되어 자빠지는 사람, 비행기를 보며 큰절을 하는 사람 등 비행 소문은 와전 되어 마치 일본인이 슈퍼맨이 된 것만 같았다.

이 에어쇼를 가슴 뛰게 지켜본 17세 젊은이가 있었다. 바로 안창남이다.



일찍 어머니를 잃은 안창남은 계모의 손에서 차별과 학대 속에 자랐다.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계모는 안창남에게 밥도 주지 않았다.
무력감으로 살던 안창남에게 에어쇼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안창남은 당장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을 배우고 싶었다.
안창남은 장롱에 있던 계모의 돈 3,000원을 가지고 일본으로 향한다.
이 돈은 아버지가 안창남을 위해 남겨둔 땅을 계모가 몰래 판 돈이었다.


비행학교를 졸업한 안창남은 민간조종사 3등 자격을 취득했지만 비행기가 없어 제국비행협회의 비행 대회에는 참석하기 힘들었다.

이 때 졸업한 비행학교에 전시되어 있는 비행기를 빌릴 수 있게 된다. 사실 이 비행기는 워낙 고장이 심해서 벌써 3명의 파일럿 목숨을 앗아간 비행기였다. 그러나 안창남은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대회가 시작됐지만 안창남의 비행기는 엔진 고장으로 이륙을 늦게 하게 된다. 비행 중에는 엔진이 꺼졌고, 급속하강을 하며 겨우 엔진을 살려냈지만 고도를 올리지 못하고 골짜기를 피해가며 500km 를 완주한다.

결국 안창남은 대회 준우승을 차지했고 이 소식은 고국의 월간지<개벽>에 소개가 되며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 후원회'가 구성이 된다.


모금액은 목표액의 1/10 도 안되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안창남은 고국의 하늘에 비행하는 첫번째 한국인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나라 잃은 국민들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는 폐기된 비행기 부품을 조립해서 비행기 한 대를 만들었다. 동체에 한반도가 그려진 이 비행기 이름은 '금강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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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남의 금강호 -한국항공박물관]

살을 애는 칼바람이 부는 12월9일, 여의도 비행장은 몰려든 인파로 발디딜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겨울 바람은 더욱 매섭게 불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서 비행기 시동도 걸리지 않았다. 손으로 프로펠러를 돌려가며 안간힘을 쓰고도 20분이 지나서야 겨우 시동을 걸 수 있었다.

이내 금강호가 하늘로 떠올랐다. 일본인들이 휘젓고 다니던 경성 하늘을 조선 청년이 날고 있다는 사실에 조선인들의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
고도 1천 미터로 상승한 금강호는 곧장 창덕궁으로 날라서 날개를 기울여 순종에게 예를 표했다.
안창남은 풀 파워를 넣고 비행기가 상승할 수 있는 최고 고도까지 올랐다. 일본인이 올랐던 고도보다 더 높이 올라가겠다는 뜻이었다
...
조선인들에게 이날 안창남의 비행은 단순한 에어쇼가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인으로 그동안 가슴속 깊이 묻어온 서러움과 울분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한풀이 의식이었다.

「세계사를 뒤흔든 19가지 비행이야기」 내용 中

1923년 관동 대 지진 발생 후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 살인을 피해 안창남은 독립군과 접촉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여운형을 만나 상하이에 독립군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싶었지만 먹고 살기조차 빠듯한 임시정부는 그 뜻을 돕지 못한다.
대신에 중국 휘하의 항공대 비행교관으로 입대하게 된다.

이 곳에서 안창남은 '융커스F-13' 을 맡았지만 이 비행기는 명성에 비해 고장이 잦은 비행기였다. 시험 비행 전 엔진 이상이 있어 이륙하면 위험하다는 안창남의 경고에도 정비사와 부대장의 고집으로 인해 세 사람은 이륙을 강행한다.

지상 500미터의 낮은 고도에서 고장난 엔진은 그대로 땅으로 쳐박혔다
그리고 생존자는 없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국의 하늘을 마음껏 날고 싶었던 청년,
임시정부의 공군 창설을 꿈꿨던 서른 살 안창남의 짧은 생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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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분입니다.

이 분을 우리가 좀 더 알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