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미원조전사 32-1, 1952년 하계 작전(221)
상황
1951년은 중국군이 유엔군의 하계 및 추계 국부적인 공세를 분쇄한 이후 전장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
피아 양측 모두 대규모의 작전 행동이 없었고 병력과 부대배치 또한 큰 변화가 없었음
유엔군 병력배치
제1선 병력
미군6개사단, 영국군 1개사단, 국군 6개사단 등 총 13개 사단
제2선
미군 1개사단, 국군 2개사단, 터키 여단 등 총 3개사단 1개여단
중국군 및 북한군
제1선
지원군 8개군, 인민군 3개군단 등 총11개 군(군단), 33개 사단(1제대는 22개 사단)
제2선
지원군 3개군, 인민군 1개 사단 등 총 3개군 10개사단
동서해안
지원군 6개군, 인민군 3개군단 등 총 9개군이 배치
휴전협정 진행과정
유엔군은 현 접촉선을 임시 군사분계선으로 하자는 데 합의
11월 27일 제3항목의제(정전에 과한 문제), 12월 11일 제4항목의제(전쟁포로에 과한 문제)에 대한 이견은 계속
중국군이 본 유엔군의 작전
<공세방어>라는 작전방침하에 현방어선 유지에 필요한 소규모 공격만을 계속하면서 중국 및 북한 군전력을 소모케 함으로써 회담진행에 협조를 강요
1952년 춘계부터 중국군과 북한군에 대한 교살전과 세균전을 실시하는 동시에, 전선정면에서 진지를 강화하고 소부대 습격요란과 공격를 진행, 공군과 포병으로 파괴활동
장기작전에 대비하여 전선의 상대적 안정기를 이용하여 후방을 견고히하고 전투력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함
1951년 12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보병 제45, 40사단을 조선에 주둔한 미 기병제1사단 및 보병 24사단과 교대
기점윤환제도를실시
미군은 부대단위 교대방식, 개인별로는 점수제도를 이용하여 병력을 교체
36점을 얻은 병사는 본국송환 가능
전선지역 근무자는 매월 4점, 후방근무자는 매월 2점
병력부족으로 1952년 4월 1일부터는 3번째 분류를 적용
전선과 후방사이의 근무자는 3점
병사들은 근무조건에 따라 한국에서 9개월 1년 및 1년 반을 근무하면 귀국할 수 있었음
국군의 전력강화
국군의 훈련과 편제를 강화, 국군 10개사단 포병을 4개 대대로 확충
국군의 후방작전
1951년 11월말, 국군2개사단(제8사단, 수도사단)을 이용시켜 후방 지리산(경남), 운장산, 회문산(전북) 지구에 활동하고 있던 유격대 소탕을 시작
@sahin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