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1(금)말이 되는 역사17. 중국인 VS 한국인

어제는 '구원'이라는 지명을 통해
중국인들의 영토(역사)의식을 살펴봤다.

九原(구원)
춘추시대 진(晋)나라 경대부(卿大夫)의 묘지를 가리키며,
이후에는 묘지를 통칭하는 말로 쓰였다.
주요하게는 중국 전역인 구주(九州) 대지를 가리킨다.

이것이 역사에서 의미가 변화되는 형태다.
귀족의 묘지는 도성 가까운곳에 있는것이 정상이니
구원이 묘지를 의미한다면,
구원군을 설치했다는 진시황의 진나라 관점에서 말이 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 이후의 과정을 살펴본다.
지도를 먼저 본다.

후한이후구원.JPG

지도의 최 상단 1번에 진시황이 설치했다고 주장하는
'九原郡구원군'이 있다.
'내몽골 자치구 바오터우 시'
지도 하단서쪽에 별표는 춘추시대 진나라의 九原(구원)이다.

시안은 진시황의 진나라 수도함양 일대이고,
오른쪽 원형 부분은 '낙양'이다.

그리고, 구원군의 운명에대한 기록을 본다.

한무제가 구원군을 오원군으로 바꿨다.
영제(靈帝:168~189) 말년에 강족(羌族)과 호족(胡族)의 침입이 심하여
정양군(定襄郡), 운중군(雲中郡), 오원군(五原郡), 삭방군(朔方郡), 상군(上郡) 등
5개 군이 모두 백성들이 흩어져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건안 20년(215),
조조가 변경의 유랑민들을 모아 이곳을 채우고 비로소 정양현을 설치하여
신흥군에 속하게 하였다. 진나라가 이를 따랐다.
<출처: 진서>

정양: “한나라 때는 태원군 양곡현의 땅이었다.
《정양현지》 권1 <지리지>

현재의 정양현은 이보다 북쪽에 있다.
이유는 뻔하다.
나중에 북쪽으로 진출해서 그곳을 정양현이라고 정한 것이다.
계속 기록을 본다.

위나라 황초黄初 원년(220년), 병주并州를 다시 설치하였으나,
형령陉岭 이북은 모두 버려졌고,
진나라에 이르러 그대로 바뀌지 않았다.
<출처: 진서>

여기서 말하는 정양(태원시 양곡)은 지도에서 중앙에 표시된 곳이다.
험준한 태행산맥의 줄기가 양쪽으로 뻗어서
중앙의 통로를 제외하면 군대가 통과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산서성은 산악지대라 통로만 막으면, 방어하기 쉽다.

자 이제 기록을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자.
후한말 에는 이미 저곳보다 북쪽은 이미 한족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상황이 삼국시대가 끝나고,
조조의 위나라를 이은 사마씨의 진나라(420년멸망)때까지
소위 구원, 운중, 오원, 삭방, 상군의 5개군은
저곳 태원시 양곡현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5개군이 한개의 현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이다.
중국의 역사기록을 읽을때,
절대로 현대의 행정구역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심지어는 '주州'가 '현'에 설치되기도 한다.

중국의 역사서를 토대로
후한말에 이미 태원 북부는 초토화가 되어서 행정구역이 사라졌고,
조조가 220년에 현재의 태원 양곡에 5개 군을 모아서 설치했다.
그야말로 이름만 유지시킨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삼국지라고 검색하면
정말 웃기는 그림들이 판을 친다.

삼국지사기수정.jpg

태원으로 옮겨진 5개군이 버젓이 지도의 북쪽에 표시되어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공부도 하지않고
그냥 중국인들이 만든 조작그림을 퍼나르는 것이다.

산서성 태원의 북쪽이 이미 한족의 영토가 아니었다고
중국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다른곳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한국사람이
중국인들이 조작해서 만들어준 그림을 버젓이 퍼나른다.
안타까운 일이다.
저곳에 우리의 역사가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