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땐 그랬었다(3)
그 땐 그랬었다 (3)
지난 글에 나눴지만, 1992년 3기 파견 8개국의 단원 중 스리랑카는 태환(토목) 선영(특수교육_분야가 정확한지 모르겠다) 인영 그리고 미희(영양사) 그리고 중소기업관리 분야 까지 5명, ‘비내리는 호남선‘을 열창하던 오목다리? 인영은 2021년 4월 뭐가 그리 바빴던자 하늘로 먼저 소풍을 떠났다. 인영은 훈련때는 몰랐지만 현지 파견 후 모두의 언니처럼 우리 3기의 필요를 먼저 챙기던 든든하고 착한, 임기를 마치고 사회복지를 더 공부해 사회복지사로 열심히 일하며 이후 동기들의 만남도 적극적이던 지금도 짬짬이 보고싶은 동기다. 이후 태환과 미희는 부부의 연을 맺었고, 선영은 캐나다로 이주해 살고 있는 소식까지 듣고 지금은 어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아쉽다. 이번 일정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들이 동기들 이었고, 어디서든 KOV정신?으로 무어든 다 잘 해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시 단원들은 분기별 또는 코이카 출장자가 있을때 각지에서 활동하다가 (당시 임기는 2년으로 한해에 두 기수가 활동하니_ 첫해는 선배기수와 먼저 다음 해는 후배기수와 함께 활동하게 되었었다) 수도 콜롬보에 위치한 호스텔에 모여 회의 및 보고?도 하고, 코디네이터를 통해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또 때론 임지에서 못 먹는 한국음식을 콜롬보에 있던 한국 식당을 찾아 원없이? 먹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호스텔에는 코디네이터(코이카와 단원들의 중간역할)가 항시 대기하고 있어 언제든 단원들의 방문에도 대처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곤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김치바라기’ 단원 몇의 청에 동기 인영이 김치 담기를 시도했고, 파김치 향수를 기대한 누군가의 청에 못이겨 머리가 작은 양파(뭐라 부르는지?)를 몽땅 사다가 파김치 흉내?를 냈는데, 문제는 그날 밥보다 맛있게 버무려진 양파김치를 덥석 욕심을 내던 사람들은 익지도 않은 생양파 김치를 너무 많이 먹고 결국 그 밤에 배탈이 난 사태를 맞았고, 그 중 어릴때부터 장이 션찮은 내겐 치명적인 밤을 보냈던 추억이 생생하다.
호스텔은 남여 구분된 방에서 밤새 수다도 하고, 아마도 금지 항목 이었을터지만, 선배 중 놀이게 능한 이의 주도로 고스톱도 치고(내 경우도 그 때 배워 익혀 기억을 더듬으며 실력울 발휘?해 돈을 잃곤 했었다) 남자 단원 몇몇은 아락(스리랑카 전통주)를 마시는 등 작은 일탈도 했을터이다. 그러나 또 그런 즐거움이라도 없었더라면 청년의 때에 이 먼나라에서 무엇으로도 달랠수 없는 각자의 어려움을 어떻게 견뎌낼을지, 요새야 다양한 볼거리 가 있고, 언제 어디서든 소통이 되는 시대니 말해 무엇하랴.
내 경우는 다행히 친구들의 잦은 편지가 있었고, 특히 편지 무게를 넘지 않게 껌을 (편지지 요새도 있는지 모르는 초록색의 껌 다섯 개를 빡빡하게 스티키 테잎으로 요령껏 움직이지 않게 딱 붙여) 보내던 벗 덕분에 껌의 위력?으로 사무실 직원들은 물론 동네 친구 아이들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었다. 동네 친구들은 넓은 공터에서 크리켓을 연습하고, 코코넛 열매의 껍질에서 얻는 작은 줄기를 이어 로프를 만들이 다시 그 로프를 꽁꽁 감아 공을 만들어 마을 공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축구도 하고, 크리켓도 배우며 현지어 공부를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든 공기를 뺀 축구공을 보내달라 청해볼 생각은 왜 그때는 못했는지 ㅠㅠ
그런 덕분에 현지어 습득이 그나마 빨랐을지 모르겠다. 이후 코이카는 차기 또는 차차기? 단원 선발을 위해 아마도 국가간의 파견 분야를 사전에 요청받고 인가?하는 과정에서 현장 확인을 하는 절차를 밟는 것으로 기억하지만(분명한 사항은 아니니) 암튼, 아마도 파견된지 약 10여개월 넘은 시점 이었던 것 같으나 이또한 정확하지 않고, 암튼 시정상 자유로운 내처지가 다른 단원보다 낫고 현지 조직이나 활동가들과 소통도 가능해 잠시 현지 출장자를 수행하며 업무를 도왔던 일도 있었다. 물론 통역사 정도를 아니였을테지만 당시 열심히 익힌 싱할라 솜씨는 우리 마을의 꼬마 친구들 덕분이었다. 손바닥 만한 수첩을 들고 다니던 기억, 발음 교정에 앞장서 지도해 주던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을지?
함반토타에서는 하숙집에서 머물렀었다. 내 경우는 한번 이사를 해서 두 곳에 머물렀다. 두 집 모두 무슬림 가정으로 첫집은 지금도 주소가 생생한 Alokapura Para 106, 부부 교사(영어선생님 부인, 체육교사 남편)와 딸과 아들 내식구 집으로, 동생인 남자아이도 동네 친구 중 하나였다. 그 집은 작은 호수를 끼고 있어 아침 저녁이 너무 좋았던, 한가지 타운과 거리가 좀 있어 콜롬보 출장을 위해 야간 밤 늦은 시간(10시~ 이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도로에 불빛이 없는 찰흙 같은 야밤 도보에 동네 개들을 피해여 했던 상황이라, 처음 얼마간 주인이 자전거로 가방을 싣고 버스정류장까지 인도해 주어 다였지만, 나중에는 배낭을 매고 자유로운 두손에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작은 자갈돌 몇 개를 주머니에 넣고, 한두개를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은 적당한 크기의 지팡이를 짚고, 일부러 딱딱 쿵쿵 소리를 내며 버스 터미널까지 다녔던 어려웠던 추억?이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사를 하게 된 사정은 어느날 콜롬보 출장 후 돌아와 빨래하고(아마도 티셔츠 등 양이 좀 되었을)빨랫줄에 널어두고 다음날 퇴근하고 돌아오니 옷들이 다 없어진 것이다. 특히 단원 파견시 지급하던 KOICA로고가 있거나 더운 이곳 사정에 맞는 그리 두껍지 않은 옷들로 이 곳 옷과는 조금 다른 재질로 만들어 졌을 터라 뭐가 달라도 달랐을지? 암튼, 반바지, 티셔츠, 타월 등등을 잃어 속상한 마음에 주인과 동행해 타운에 있는 경찰서에 신고를 했지만 이내 후회했던 기억이 있다. 관리 못한 나도 그렇고 오죽했으면…..,
암튼 이후 사무실 직원들의 조언에 따라 야간의 어려움 등등으로 타운 가까운 곳 무슬림 가정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곳 부부 중 남편은 어렸을때 마도로스로 원양어선을 탔었도스리랑카에서는 광산에서 일한 경험이 있던 조용한 분이었는데 무용담을 나눌때 특히 광산얘기는 늘 열정적인 설명을 하던 분으로 기억하고, 무엇보다 집 주변에 형제들, 사촌들이 많아 잦은 손님의 방문이 기억이 난다. 오늘 내일 중으로 두집을 방문해볼 참인데, 알로카뿌라 그 곳은 쓰나미 이후 어떤지 이 곳 친구들도 기억을 못하고 있어 찾을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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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그간 저는 코로나에 걸려서 정신 못차라고 있었습니다. 이제 좀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