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땐 그랬었다(2)
최종 파견국으로 스리랑카 임을 알게 되면서도, 지금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당시 ’실론’이라 불렸던 스리랑카에 대해 어떻게 공부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으니 나이가 든것이 분명하다 싶다.
어찌어찌 스리랑카는 인도 남부 해안에 위치한 섬나라로 ‘인도양의 진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어 인도 정도는 그나마 나름 이해하고 있었고, 인도의 경우는 봉사단 활동을 마친 후 시작한 원단 무역회사-처음엔 터키 회사의 서울사무소 책임자로 무역 업무를 시작했고, 1997년 7월경 창업을 하게되어, 당시 대상국으로 인도, 중국, 홍콩을 자주 찾게 되었었다. 이후 터키는 물론 동유럽을 포함 유럽 몇 나라와 동·서남아시아로 확장하며 원단, 원사, 자동차 등 한국산 제품을 해외로 수출하고 중개하는 작은 무역상으로 성장했었다.
직원 수가 늘고 안정적인 운영을 하던 어느 해인가, 스리랑카에 봉제 공장이 많아 그리운 그 곳에도 원단 중개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조언을 받아, 첫 출장을 위해 단단히 준비하고 콜롬보를 방문했었다. 물론 사전에 방문할 공장 리스트도 잘 챙겼고, 시장에 맞는 원단 샘플 정리를 깔끔히 해 콜롬보에 도착해서 약속한 공장을 찾으며 미팅 하던 중, 급히 누군가가 새롭게 진출하려는 초보 랑카 방문자를 소개해 달라는 청을 받았다며 봉사단 활동 때 부터 콜롬보 업무로 출장시 찾던 교회 목사님으로 연락에 급히 일정을 조종해, 이니 스리랑카에서 원단 중개를 하고 있던 선배 중개상을 만나러 갔었다.
인사를 나누자 샘플을 보고해 보따리를 풀자 이런저런 사정을 꼬치꼬치 묻더니, 결국은 ‘스리랑카 시장 개척은 봉제품 구매하는 원청자들이 특별히 까다롭고, 봉지공장은 구매 권한도 없는 등등‘ 모를리 없는 이유들을 열거하며 경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팅 이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억울함과 분함으로 목사님께 하소연하고, 결국 그 선배?의 계략에 빠진 어리숙한 스스로를 달래며 목사님께 정중히 인사드리고 스리랑카 시장은 포기하게 되었다. 그 후 원단 중개가 아닌 고향 방문으로 여러차례 다시 찾곤 하다가 다시 몇 년 뒤, 한국산 실(yarn)의 최종 도착지가 콜롬보였고, 또 무역하는 후배들을 도와 실론차와 코코피트(코코넛 껍데기로 만든 원예용 소재) 중개를 도운 계기도 마련했었다. 사실 몇 몇 사례는 중개를 시작하면서 초기 많은 노력을 통해 얻은 기회를 결국 현지와 한국의 후배 창업자들에게 기회를 넘겨주었고, 그 중 당시 사업기회를 넘겨 받은 현지 청년은 이후 결혼해 자녀를 셋이나 두었고 큰 딸은 대학 졸업후 직장인이 되었다. 다만, 새로운 직장에 적응이 어려운 사정을 이번 일정 첫날 늦은 밤 콜롬보 공항 근처 호텔을 예약하고 공항에 마중나온 아빠를 통해 듣게 되었다. 청년이던 아빠는 50대로 흰머리가 수두룩한 중년이 되어 사업을 지속하지만 사업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어, 함반토타에서 콜롬보로 가는 30일 이후에 다시 만나 무언가를 찾아보자고 했다.
세상의 인연은 끊이지 않을 것이고, 할 수 있다면 또 무언가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 할 것이다.
스리랑카는 적도 근처에 위치해 연중 기온이 높고 습하다. 계절풍의 영향으로 남서부는 비가 많이 오고, 북동부는 비교적 건조한 편이다. 이런 날씨는 풍토병을 얻고 치료 후 다시 랑카로 돌아온 내게는 치명적인 또 다른 사연을 만들었는데, 지인들은 기억할지 모르는 풍토병인 ‘댕기열병’으로 파견 된지 1년 2개월 여 지난 이후 한국으로 후송되었던 사연은 또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스리랑카의 역사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한국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유명 관광지를 통해 기원전 5세기경 인도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싱할라족의 기원이 되었고, 기원전 3세기경 불교가 전파되어 국교로 자리 잡으며 불교 문명이 발달했다. 아누라다푸라 왕국과 폴론나루와 왕국이 번성하며 많은 유적을 남겼고, 이로 인해 국민들의 긍지가 나름 매우 높은 나라라고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16세기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 지배를 차례로 받았고, 특히 영국 식민지 시기에는 ‘실론(Ceyl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홍차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 역사는 또 다른 분야이니 이번엔 미뤄두겠다. 다만,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며 1972년에 국호를 스리랑카로 바꾸었고, 이후 싱할라족과 타밀족 간의 민족 갈등으로 오랜 내전(1983~2009)을 겪었다. 그 시기에는 자프나 지역을 갈 수도 없었고, 몇 차례 사제 폭탄이 터지며 갈등이 이어졌으며, 우리 동기들이 활동 할 때 즈음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을 직접 겪기도 했었다. 그 때의 무용담 몇 가지도 미뤄야겠다.
특별히 이 곳 도착과 동시 당연히 시작된 수저나 포크 없이 손으로 밥과 반찬을 섞어가며 비비고 뭉쳐 먹는 이곳의 전통에 따라 봉사단 훈련 때부터 익힌 솜씨를 이번 일정에서도 여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 전통은 빈부와 상관없이 모두의 식습관으로 현재까지 잘 지켜지고 있음도 놀라웁다.
오늘은 그나마 바람이 있고 여행하기에 적절한 주말, 랑카 인연 Latha의 둘째 딸이 근무하는 몬테소리에서 ‘Dambana Lake’로 소풍을 갔고, 이 곳에서 네시간 여의 여정에 합 류해 오늘 1:30AM에 숙소로 돌아온 강행군을 했다. 옛날 기억이 그대로 살아난 즉, 도로 사정이 조금 나아진 것 외엔 변한 것이 없어 전혀 없는 것 같은, 관광지로 향하는 버스 정식과 볼륨의 최고정도 랑카음악, 수도 없이 경적을 울리며 거리를 달리는 ‘깡패 버스’를 타고 이동하느라 체중 감량이 톡톡히 됐을 것이다.
다시 함반토타로 돌아와서,
‘함반토타 여성 개발 연맹’이라고 번역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Hambantota WDF(Women Development Federation)는 스리랑카 남부 함반토타 지역의 여성과 빈곤층을 돕는 비영리 단체다. 이 단체는 지역의 빈곤 해소와 여성 역량 강화를 주요 목표로 활동하며, 스리랑카 내에서 가장 큰 여성 단체 중 하나로 현재 7만 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WDF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Micro Credit~>마이크로파이낸스를 통한 소액 대출이다. 빈곤 가정의 여성들이 소규모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신용 대출을 지원하고, 저축 습관을 형성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활동은 한국의 새마을운동과 새마을금고 운동을 견학한 경험을 바탕으로 확대되었다. WDF의 활동은 고금리 사채업자들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역할도 충분히 해냈다.
뿐만 아니라, WDF는 어느새 여성 사업자들에게 사업 관리, 기술 개발, 시장 접근성 향상 등을 위한 교육과 멘토링을 제공하고 있었으며 보다 체계적인 활동을 위해 끊임없이 대외기관과 해외 NGO의 도움을 받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제 미팅을 통해서 알게되었으니 지난 30년간 꾸준히 학문으로 또 활동으로 이어오고 왔으니 이보다 더 신나는 일이 있을까~~!!!
@leemikyung, what a captivating journey through your history with Sri Lanka! Your post beautifully weaves together personal anecdotes, historical context, and insightful observations about the country's development. I especially loved how you connected your early trading experiences with your current involvement with the Hambantota WDF. It's fascinating to see how your paths have intertwined over the years. The story of the young man you helped, now a father with a college-graduate daughter, truly highlights the lasting impact of your efforts.
The detailed descriptions of Sri Lanka's culture, from the food traditions to the "깡패 버스," paint such a vivid picture. Your reflections on the WDF's work and its connection to the Saemaul Movement are incredibly insightful. Thank you for sharing this inspiring story of perseverance, connection, and making a real difference! What are your hopes for the future of the Hambantota WDF, and what kind of support do you think would be most impactful for their continued success? I'm eager to hear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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