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색 경보 (Red Siren)

in #novel7 years ago

주말이라 늦은 시간 일어나서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다. 젠장.. 헬레나와 카페에서 12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준비할 시간도 거의 없다. 헐레벌떡 일어나 옷을 벗고, 샤워를 하고, 거울을 봤다. 눈 주변은 퀭하고, 기력이 없어보인다. 이제 25살로 인생에서 활기로 가득찰 나이지만, 마리가 떠나간 후로는 예전의 생기가 함께 떠나가버린 것 같다.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또렸하다. 마리와 나는 사귄지 1년 정도 되었었지만, 여전히 나는 그녀에게 나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사실 어느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 일이 있던 것은 14살 정도였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 배속에서 무언가 쥐어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방학 때였고, 부모님은 바캉스 여행으로 이탈리아에 계셨다. 주말이기도 해서, 병원에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응급실로 가기는 두렵고 싫었다. 정말 죽을 듯이 쥐어짜는 고통이 지속되었다. 간신히 침대에서 나와서 대충 바게트를 씹어서 목구멍으로 넘긴 뒤, 그것이 빨리 위속에서 소화되기를 기다렸다. 그 기다리는 시간은 마치 파리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지루하기 짝이었는 폴이라는 애가 옆에서 자신의 게임 얘기를 할 때와 같은 것이었다. 평소 잘 하지도 않는 욕설이 머리에서 떠돌아다닐 때쯤 진통제 3알을 입에 털어넣고, 물을 삼켰다.
그 약은 천천히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내 위속에서 분해되고 장으로 내려가 비명을 지르며 기다리던 장에게 붙잡혀 다시 뇌로 솓구쳐 올라, 시냅스를 타고 고통이 있는 부분에 분무했을 것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여전히 배는 아프고 불편했으나, 숨은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TV를 틀어, 아무 채널이나 돌리다가 편안한 소파의 품속에서 잠에 빠지고 말았다. 너무 큰 고통이었을까, 아니면 약의 기운 때문이었을까, 한 참동안 잠들었던 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에 일어났다. 아래를 보고 기겁을 하고 말았다. 내 하늘색 속옷이 시뻘건 피로 물들어있는 것이었다. 나는 꿈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건 분명 꿈이 아니었다. 나는 기겁하여 화장실로 달려갔고, 속옷을 벗어 그곳을 보았다. 이미 피범벅이 되어 잘 보이지도 않았고, 곧장 샤워기를 틀어 물을 뿌려댔다. 이게 무슨 일인가... 혹시 내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일까. 나는 아직 성인도 못되보고 죽게되는 것인가. 친구들과 핀 담배로 인해서 내 몸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프랑스의 수많은 사람들이 어릴때부터, 내 나이부터 흡연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성기에서 피가 나왔다는 사례는 들은 적이 없다!
나는 그렇게 멍하니 수 만 가지의 생각에 잠겨서 화장실 욕조에 앉아 있었다. 희안한 것은 그 부분에서는 전혀 고통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욕조에서 일어나 속옷을 씻어서 널어놓고, 식탁으로 와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소변을 봐서 어떤지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 잔의 물을 연거푸 마신 나는 배가 불러서 더는 마실 수 없었다.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순간이었다. 나의 주치의는 장 피에르 선생님인데, 아버지의 절친한 동창이기도 하고, 어머니와도 상당히 친분이 깊다. 그렇기에 그에게 상담을 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고 친구들과 이야기 하자니, 누구와 얘기해야 할지 막막하다. 마르셀과 이야기하자니... 그는 입이 가벼워서 금방 소문이 퍼지고 말 것이고, 제라리와 얘기하자니 그는 나보다 더 기겁하여 토해버릴지도 모른다 (평소 그는 피만 봐도 기절하고, 피에 대해 얘기만 해도 속이 미식거린다고 했다). 그때 생각난 친구가 있었다. 바로 캐서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