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Too) 운동 원조는 누구?
안녕하세요. 마이스터 스팀지기(@meisternews)입니다.
오늘은 '미투(#MeToo)' 운동의 원조가 누구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미투' 운동 원조는 누구일까?
여러 해석이 나오지만, 미국의 여성방송인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 1954~ )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그는 어렸을 때 자신도 당했다고 TV를 통해 고백해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임신까지 했다는 사실을 용감하게 밝힌 것이다.
부끄러운 과거 고백이 오히려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
윈프리는 인종 차별이 심한 미국 남부 지방에서 흑인으로 태어나 가난하고 평탄치 못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태어나서 6년 동안 미시시피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생활하며 자랐다. 어머니는 윈프리를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맡겨둔 채 일자리를 찾아 밀워키로 옮겨갔다.
외할아버지는 농장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조그마한 땅을 가지고 있는 농민이었다. 때문에 윈프리는 가난한 생활을 했다. 수도 배관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양동이로 물을 길어오는 일은 윈프리의 몫이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매우 엄격하게 손녀딸을 교육시켰다. 이런 할머니의 엄격한 교육은 오프라 윈프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윈프리는 종종 부모님의 관계를 두고 “오크 나무 아래서 일어났던 단 한 번의 실수”라고 표현하곤 한다. 아버지 버논 윈프리는 어머니인 버니타가 임신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태어나서 6년 후 윈프리는 어머니를 따라 밀워키로 옮겨간 뒤에 이복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어머니와 이복동생들과 함께 생활했던 시절 내내 윈프리는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했다. 4학년이 되어서야 그녀는 아버지 버논 윈프리와 새어머니 젤마와 함께 내슈빌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9살 때 윈프리는 친척에게 처음 성폭행을 당한 뒤로 몇 명의 친척들과 주변인들에게 잇따라 성폭행을 당했다. 열세 살 때에도 그러한 일이 반복되었다. 이 이야기를 아버지는 믿지 않았고, 이 일로 부녀 사이는 잠시 멀어지기도 했다.
열네 살, 윈프리는 돈을 훔쳐 가출을 했다. 그리고 가출한 윈프리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과 성 관계를 가지는 타락한 생활을 하다가 밀워키 청소년 감호소에 맡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청소년 감호소는 수용인원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윈프리는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윈프리를 데려왔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빗나가는 윈프리를 어찌할 수 없었다. 윈프리 아버지에게 딸을 보낸 것이다. 그는 그녀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제시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지킬 것을 요구했다. 새어머니 역시 엄격하게 윈프리를 대했고, 윈프리는 새어머니를 혹독한 교관인 것처럼 기억한다.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내슈빌에 돌아온 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열네 살에 윈프리는 아들을 낳았다. 조산으로 태어난 아이는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이후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 속에서 윈프리는 내슈빌에서 교회의 순회 설교 때마다 노련한 설교자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대중 앞에서 연설을 했는데, 이것은 뒤에 윈프리가 자신의 이미지와 인격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자꾸 비행으로 빠져들던 그녀를 다시 잡아준 건 아버지의 관심이었다. 망가져가는 딸의 모습에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오프라 윈프리는 아버지 눈에 맺힌 눈물을 보며, 이제부터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으로 그동안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했고, 학업에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며 빠른 속도로 성적을 향상시켜갔다. 어느새 친구도 많이 사귀고, 학교 수업 이후엔 연극반이나 토론 클럽 같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클럽활동이나 다른 학교 행사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오프라 윈프리는 나이답지 않은 세련된 연설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렇게 자신의 활동영역을 조금씩 넓혀 나갔고, 유명세를 타면서 여러 시민단체의 주요 행사에 연사로 초대돼 자신의 연설 실력을 마음껏 뽐냈다. 그러던 중 ‘백악관청소년회의’에 1,400여 명의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된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윈프리는 라디오 방송국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재치 있는 말솜씨를 인정받아 오디션을 거쳐 방송국 오후 시간대 라디오 뉴스 진행을 맡게 됐다.
뉴스 진행은 그에게 그다지 적합하지 못했다. 뉴스 취재 중에 나타난 탁월한 ‘공감력’이 객관적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공감력’은 토크쇼를 진행하며 큰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오프라 윈프리쇼>를 통해 오프라 윈프리는 ‘토크쇼의 여왕’이 되어 방송 역사를 다시 써 나갔다. 전 세계 외롭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며,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윈프리는 2013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명인사로 선정되었다. 윈프리는 이런 어린 시절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현재는 누구나 존경하는 여성이 되어 있다. 윈프리는 미국 CBS-TV에서 ‘오프라 윈프리 쇼’를 25년간 5,000회 진행한 토크쇼의 여왕이 되었다. 미국 내 시청자만 2,200만 명에 달하고 세계 140개국에서 방영되기도 하였다. 이후 주식회사를 창립해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로부터 재산 10억 달러 이상의 부자로 인정받았다. 현재 윈프리는 미국에서 최고의 부자 대열에 합류했으며, 미국의 상위 자선가들 중 첫 번째 흑인계 미국인이며, 세계에서 유일한 흑인 억만장자이다.
오프라 윈프리가 미투 물결의 원조인가요?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볼 수 있지요.
그 때 당시에는 쇼킹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