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에 사라진 고대 도시, 폼페이
AD 79년 8월 24일 오후 1시.
캄파니아주, 폼페이 인근에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놀랬지만,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고 있을 뿐이다.
화산, 용암, 부석(Pumice)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화산은 15Km의 높이로 치솟았다.
검은연기가 태양을 가리자 낮은 컴컴한 밤으로 변하고 말았다.
바로 앞의 있는 것 조차 분간 못할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당시 로마 제국의 리조트 도시 폼페이에는 2만여 명
(노예 8천 여명 포함)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곳에는 목욕탕, 시장, 경기장, 극장, 술집, 식당 등
시민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거의 갖추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베수비오산에서 뿜어진 화산재와 부석은
놀라운 속도로 폼페이를 덮치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부석은 처음에는 가벼운 돌이었다.
하지만 돌덩어리가 점점 커지면서 돌에 맞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단 빠른 사람들은 스타비아이(Stabiae)로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다.
스타비아이는 폼페이 남쪽 나폴리 만(Golfo di Napoli)을
끼고 있는 작은 해안도시다.
폼페이 시민들이 화산을 피해 도망갈 곳은
오직 바닷가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배를 타면 화산폭팔 영역 밖에 있는
미세눔, 수렌툼 등 다른 지역으로 떠날 수가 있었다.
당시 미세눔에는 해군 제독, 대플리니우스(Gaio Plinio Secondo)
가 지휘하는 로마해군본부가 있었다.
대플리니우스는 군인겸 정치가였지만,
자연과학 등에 관심이 많은 학자이기도 했다.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알려진 박물지(Historia Naturalis)
37권이 바로 그가 저술한 책이다.
박물지는 천문학, 인류학, 생리학, 동물학, 식물학, 약학,
광물학, 의학, 미술에 이르는 광대한 대백과사전이다.
그는 박물지 제3권 5장에서 ‘캄파니아는 자연이 아름답고
곡물이 풍부하여 천혜 풍성한 땅이다’라고 기술한 바 있다.
그만큼 캄파니아주를 사랑했기에 그는
‘모든 배는 폼페이로 가서 바닷가로 탈출한 사람들을 구하라!’
라고 외치며 화산재와 부석이 떨어지는
스타비아이로 배를 타고 건너 갔던 것이다.
밤 8시가 되자 폼페이 도시는 거의 파괴됐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도시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임신부나 어린아이, 노약자, 그리고 최후 결단을 내리지 못한
부자들이나 미신 믿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다음날 새벽 1시쯤에는 거대한 화산폭발이 이어지며
폼페이는 그 후 60피트 높이의 화산재와 부석,
그리고 용암으로 뒤덮혀져 잊혀진 도시가 됐다.
화산폭발이 이어진 18시간 동안 베수비오산에서 뿜어진
화산재와 부석은 약1백억 톤으로 추정한다.
1500년이란 세월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러던 1599년 어느날, 운하 공사를 하던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가 폼페이 유적을 발견한다.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는 스페인의 영향 아래 있었기에
스위스 태생의 폰타나는 유적을 더 이상 파지 않았다.
유적 발굴이 시작된 것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1748년부터.
당시 나폴리를 여행한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글에 의하면
베수비오 화산은 그때까지도 불을 뿜었다고 한다.
용암도 계속적으로 분출되어 바다 쪽으로 흘러 가고 있었다고
‘이탈리아 기행 2(1787년)’에서 서술했다.
그 와중에서 프랑스는 발굴되는 유적들은 프랑스 왕궁으로
모조리 실어가 버렸다.
이탈리아인의 주도 아래 유적 발굴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가 통일된 1861년부터.
당시 발굴대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고고학자인
주세페 피오렐리(Giuseppe Fiorelli)였다.
그는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방금 식사를 한 듯한 집에서도
어떠한 공공장소에서도 사체를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용암과 화산재가 식어진 흙더미 사이에서
이상한 형태의 빈 공간들이 남아 있었다.
피오렐리는 이 의문의 공간을 주목하고 그곳에
석고를 부어 넣었다.
그리고 석고가 굳은 다음 주변의 훍을 긁어 내자
하얀 석고는 놀라운 형체를 들어 냈다.
빈 공간에는 당시 용암에 사라져 버린 사람들과
동물들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하얀 석고는 폼페이의 마지막 순간들을 생생하게 재현시켰다.
폼페이는 2006년에 이어 내게는 두 번째 방문이 된다.
세월이 흘러서인지, 발굴된 유적지가 10여년 전보다는
조금 더 많아졌다는 것을 느낀다.
천천히 아직까지도 발굴중에 있는 폼페이는 원래
물고기 모양으로 설계된 고대의 계획도시였다.
물고기의 눈에 해당되는 지역은 동쪽 끝에 위치한
원형극장(Amphitheatre)이다.
기원전 2세기에 건축된 원형극장에는 12,000 ~ 20,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남쪽에는 음악회와 시낭송 등을 한 것으로 보이는 소극장
(Odeion: 수용 인원 1500명)과..
5000 명을 수용하는 대극장(Teatro Grande)이 있다.
놀랍게도 대극장에는 개폐식 천막까지 설치돼 있었다고 한다.
천장을 완전히 덮은 거대한 천막은 뜨거운 태양빛이나
소낙비로 부터 관중을 보호할 수 있었다.
신전은 폼페이에 모두 다섯 곳이 있었다.
포르투나 오거스타 사원(Temple of Fortuna Augusta)..
아폴로 사원(Temple of Apollo)..
주피터 사원(Temple of Jupiter)..
비너스 사원(Temple of Venus)..
베스파시안 사원(Temple of Vespasian)..
이중에서 베스파시안은 신이 아닌 황제로 로마의 콜로세움을
건설한 로마의 황제(재위 69~79년)였다.
그는 79년 6월 24일 사망했는데 두 달 후,
폼페이 화산이 폭팔한 것이다.
폭발 당시의 황제는 그의 아들이자 로마제국의 열 번째
황제인 티투스(Titus)였다.
식료품시장(Macellum)은 당시 상업활동의 중심지로
오늘날의 시장(지붕있는)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는 식료품점, 생선가게, 과일가게, 채소가게, 정육점 등
크고 작은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고 한다.
스타비아나 도로(Via Stabiana)는 폼페이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도로로 양쪽으로 상가가 많이 있었다.
대중목욕탕(Terme del Foro)은 남자탕과 여자탕의 구분이 있었다.
손으로 빛을 가리고 보면 창문 바로 아래에 수염있는 남자의
얼굴 모습이 남탕임을 확인해 준다.
안에는 냉탕, 온탕, 열탕, 녹차탕, 사우나 등 다양한 종류의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손님들의 옷을 보관하는 옷장은 벽에 조각해 놓은
아틀란테스(Atlantes)를 보고 확인했다.
아틀란테스는 기둥 상층부를 짊어지고 있는 남성상을 말한다.
남성상은 모두 다른 모양으로 조각됐는데 그 사이 사이에
있는 공간이 손님들의 옷보관함이다.
선술집(Thermopolium Caupona)은 옛 우리의 주막집과
비슷한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뜨거운 음료와 음식을 제공했는데,
이층에서는 매춘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그 이유는 지중해의 여러 지역에서 온 선원들을 맞아
주인은 같은 고향의 여인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먼 곳에서 온 손님들은 고향에 온 것처럼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었을 것이다.
당시 매춘부의 화대는 적게는 2아스, 고급 매춘부는
16아스를 받았다.
2아스는 싸구려 와인 한 잔을 살 수 있는 아주 적은 돈이다.
비코의 홍등가(Vicolo del Lupanare)는 폼페이시에서
허가한 창녀촌이었다.
건물 밖에는 남자의 성기를 조각한 큰 돌이 있고,
안에는 외설적인 그림들이 벽에 그려져 있다.
그 중 프리아포스(Priapus)는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번식과 다산의 신이다.
이곳에 오는 남자들은 대개 외국인 선원들과 주위에
사는 하층민 계급의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화산재 때문에 거리가 멀어졌지만 당시는
성문 500m 앞에 바다가 있었다고 한다.
길가에는 군데군데 말 고삐를 묵어두던 고리가 있다.
고대 폼페이의 주차장이다.
돌길에는 하얀 조각들도 보였는데 이것은 밤에 마차들이
잘 오갈 수 있도록 만든 야광장치였다.
그 외에도 바실리카, 포룸, 파우노의 집, 베티의 집,
곡물계량소(Mensa Ponderaria) 등이 있다.
곡물계량소는 현재 항아리, 건축물의 기둥, 석고시체 등
발굴품 보관소로 사용된다.
화산 폭발로 사망에 이른 폼페이 시민은
약 2,000명 정도로 추정한다.
그 중에는 시민들을 구하려 스타비아이로 갔던
해군 제독, 대플리니우스도 있었다.
기관지에 염증이 있던 그에게 화산재와 독한 가스는
목숨을 빼앗을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화려했던 폼페이 돌길을 걸으며 당시 슬픔을 당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죽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살아 남은 사람에게도
큰 충격이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한순간에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들을 잃은 엄청난 슬픔.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사랑을 하게 되고..
그 사랑은 나의 일생에서 단 한 번 밖에 없는
기막힌 사랑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될 영원한 우리들의 사랑.
폼페이 유적지로 들어 간다
세월이 흐르자 풀과 나무도 자랐다
폼페이 신전이 있는 유적지
10피트 깊이의 화산재를 걷어 내자 나타난 2,000년 전의 폼페이
중앙 공회장은 차가 들어 올 수 없는 보행자 전용구역이었다.
관광객들이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중앙공회장으로 향하고 있다.
폼페이 포로 목욕탕(Granai del Foro)입구(왼쪽 건물)
목욕탕 위로 구멍을 낸 것은 자연채광과 수증기를 빼기 위한 목적이었다.
지금의 공중목욕탕이나..2,000년 전 목욕탕이나 거의 비슷하다.폼페이에는 3개의 목욕장이 있었다.
손으로 빛을 가리고 보면 창문 바로 아래에 수염있는 남자의 얼굴 모습이 남탕임을 확인해 준다.
당시의 목욕탕 사물함,사물함 구분을 위해 동상 모양을 모두 다르게 조각했다.남탕은 탈의실, 냉탕, 온탕, 증기 목욕탕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사거리에 세워진 칼리굴라 황제의 개선문
음식을 만들고 팔던 식당
유리상자 안에 있는 것이 화산재와 연기때문에 질식사 한 젊은여인의 하얀 석고
폼페이 대극장(Pompeii Large Theatre)
Wow very good place of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