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성공한 공연, 하지만 본래의 목적은 실패했던 행사. Live Aid 1985(1)
아재는 조심해서 살아야 합니다. 특히 대한민국 아재가 본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려면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은 주요 선진국 리스트의 말석에 올라가는 대한민국이지만, 아재들의 학창시절은 전형적인 제3세계 군부독재 국가였단 말이죠. 거기다 냉전이라는 기괴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동독에선 청바지 입고 미국 락음악 듣고 다녔다간 비밀경찰인 슈타지에게 끌려가 죽도록 맞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그 동독보다도 한참 못살았고, 억압의 수준은 비슷했습니다.
그 시절의 이야길 하는건 거의 태극기 드는 어르신들이 주로 하시는 맥락의 이야길 하기 딱 좋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유는 오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며,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문제고, 대한민국이 국제분쟁의 확산에 기여한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인기를 끌었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절정에 해당하는 1985년 Live Aid 이야깁니다.
이 공연 실황을 그때 MBC TV를 통해 보셨을 청취자 분들은 얼마 안되실거에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개봉 전까지만 해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라디오에서 꽤 많이 나오는 Do they know it’s Christmas, 혹은 We are the world라는 인기 곡이 알려진 콘서트다 정도로 알고 계셨을 분들이 더 많을 겁니다. 그 당시 고딩이었던 저는 대한민국에서 금지곡이었던 보헤미안 랩소디를 TV 라이브로 봤다는 감격 밖엔 기억나는게 없습니다만… 각설하고.
이야기는 19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의 공영방송인 BBC는 성경의 묵시록에서 표현된 수준의 기근이 에티오피아 북부를 쓸고 있다는 보도를 합니다. 이 보도에 수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죠. 그들 중엔 아일랜드 출신의 밥 겔도프가 있었습니다. 그는 같이 영국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밋지 유어와 함께 Do They Know It’s Christmas?를 작곡하지요. 그리고 이 곡을 당대의 영국 최고의 인기가수들과 함께 녹음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노래 한 곡으로 당시 800만파운드, 물가변동률을 감안하면 지금돈 2160만 달러, 한화 243억원이 넘는 기금을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이 성공을 바탕으로 밥 겔도프는 다음해인 7월 16일, 대서양을 잇는 대규모 자선 콘서트를 기획하게 되지요. 7월 13일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이움과 미국 필라델피아 JFK 스타디움에서 동시에 시작된 콘서트는 장장 16시간에 걸친 공연을 펼쳤습니다. 당시 자신의 일정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던 뮤지션들은 별도의 영상을 만들어서 헌정했죠. 당시 전세계 인구의 40%가 봤다는 이 공연은 총 1억 5천만 파운드를 모으는데 성공합니다. 요즘의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4억7천7백만불에 달합니다. 한국돈으론 5천억원이 넘습니다.
자, 슈퍼스타들이 나와서 어마어마한 돈을 모금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돈만 모으는데 성공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밥 겔도프는 아티스트지 지정학에 정통한 지역 전문가도, 긴급구조 전문가도 아니었어요. 예를 들어 국경없는 의사회는 이 공연을 기획하던 밥 겔도프에게 에티오피아 기근 문제를 당신처럼 접근하면 에티오피아의 독재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과 직접 손을 잡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구호기금의 상당액은 그의 군부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소련에서 무기를 사들이는데 쓰일 것이라고 경고했지요.
하지만 국경없는 의사회, 약칭 MSF의 이 경고에 대해 겔도프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나는 왼손으론 악마와 손을 잡고 오른손으론 우리고 도우려고 하는 이들의 손을 잡을 것입니다” 뭐 그럴듯하게 들리나요?
뭐 문제가 몇 가지 있었습니다. MSF는 1971년 나이지리아의 비아프라 전쟁에서 무기력했던 국제적십자사 활동에 빡친 의사들이 기자들과 결합해 독립한 조직이라는 겁니다. 분쟁, 기아, 재난 상황에 대해선 이들만큼의 구력을 가진 이들이 별로 없지요. 한 마디로 프로페셔널 구호전문가가 ‘너 그러면 안된다’고 말 했는데, 이 문제에 있어선 거의 백지나 다름없었던 예술가가 조까라고 한 것이었죠.
두 번째는 지정학적 상황입니다. 지금이라도 구글 맵 혹은 세계 지도를 한번 찾아보세요. 지금의 에티오피아는 내륙국가입니다. 1991년에 에리트레아가 독립했거든요. 그런데 옛날 에티오피아의 국경선으로 보면 홍해와 바로 붙어 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이 중동에서 석유 수입하려면 안 지나치기가 좀 어려운 지역이지요. 거기다가 수에즈 운하를 통해 유럽-중동-인도양-아시아로 이어지는 세계적인 무역루트에 붙어 있는 국가기도 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지정학적으로 상당한 중요성을 갖고 있는 나라였다는거죠. 그런데 문제는 이때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밥 겔도프는 부유한 G7국가들이 에티오피아의 기근 상황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질타했지요. 하지만 당시는 냉전의 절정이었던 시절입니다. 미국의 전략방위구상, 소위 말하는 스타워즈 플랜이 나왔던 것이 1983년입니다.
여러분, 톰 크루즈 주연의 아메리칸 메이드라는 영화 혹시 보셨나요? 영화 막판에 주인공 배리씰이 미국의 여러 연방 수사기관에 동시에 체포되었을때 아칸소 주검사장은 전화 한 통을 받고 그를 풀어주라고 하지요. 그 다음에 주인공은 바로 백악관으로 끌려 갑니다. 그리곤 이란-콘트라 스켄들이 쓰윽 지나가지요. 이 사건은 79년에 단교했던 이란에게 미국 무기를 비싸게 팔아먹고 그 돈으로 니카라과의 우익 반군인 콘트라에게 무기를 공급했던 사건입니다. 그게 1986년이에요. 미국이 자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단교까지 했던 이들과 뒤에서 손을 잡아서 때려 잡아야 할 정도로 사회주의 정권은 악의 축이었어요. 아프리카 대륙에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의 사회주의 정권은 G7 정상에겐 때려잡아야 할 사회주의 정권이었단 말이죠.
마지막으로 밥 겔도프는 에티오피아에서 1983년부터 1985년간 발생했던 그 대기근의 원인들을 무시했었습니다. 밥 겔도프가 30년이 지난 2005년에 Live Aid와 유사한 Live 8 공연을 기획하자 미국의 대표적 지성인 수전 솔택의 아들이자 원조 전문가인 데이비드 리프가 이를 비판하는 칼럼을 가디언지에 보냅니다. Cruel to be kind, 그러니까 ’장래를 위해 엄하게 하겠다는 이야기인가?’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그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이어졌던 대기근의 원인이 세 가지였다고 지적합니다.
첫 번째는 2년간 계속되었던 가뭄이었지만 남은 두 가지는 전적으로 인재였다고 지적하지요. 하나는 독립을 시도하던 북부 에리트리아 반군들과 티그레안 인민해방전선과의 전쟁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경작지를 포기하고 피난을 떠나야 했다는 것이 하나고, 두번째는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사회주의 군부독재정권이 밀어붙였던 집단 농장화 정책이었습니다.
데이비드 리프는 밥 겔도프의 활동으로 인해 서방세계의 관심이 에티오피아에 집중되자 에티오피아 군사정부는 밥 겔도프가 모았던 기금을 아주 교묘하게 이용했다고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북부 지역에서 벌어지던 내전 지역의 주민 60만명을 남서부 지역으로 강제 이주 시켰다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최소 5만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MSF의 경우엔 10만명은 죽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요. 이를 비판하자 밥 겔도프는 1985년 11월 4일 아이리쉬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전체 기근의 규모로 놓고보면 그 숫자는 깜짝 놀랄만한 정도는 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에 우석훈 박사는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하지요. 원래 동북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주식으로 삼는 것은 테프라고 하는 벼과의 작물로 만든 은저라라는 빵입니다. 테프는 기장 비슷한 건데 한국의 당뇨 환자들이 꽤 찾아서 우리나라에도 수입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부터 에티오피아의 상당 지역엔 이 테프 대신 환금성이 높은 작물이 재배되었다네요. 커피 말입니다. 그런데 국제 원두 값이 폭락하자 이를 포기하고 다시 테프를 경작하려고 하니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다년생 작물인 커피의 뿌리가 지표면 밑으로 아주 깊숙히 들어가서 뽑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는거에요. 이런 상황에서 가뭄이 닥쳤다면 더 답 없었겠죠.
그리고 제3세계의 빈곤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질병이나 기아보다 더 심각한 위협은 부패한 정부라고 말입니다.
밥 겔도프가 얼마나 나이브하게 생각했는지는 그가 그렇게 모은 돈으로 뭘 하려고 했는지 보면 됩니다. 그는 그 돈을 굶주리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 직접 전달하려고 했어요. 인프라가 없는 곳에 돈을 던져주면 그건 불쏘시개 밖엔 안되는데 말입니다.
영국의 데일리 메일은 2010년 3월 19일 Live Aid로 모금된 돈 중 10~20%에 달하는 금액이 무기를 사는데 쓰였다고 보도했습니다. 당시 에티오피아에서 구호물자 배급에 나섰던 이들의 증언에 바탕을 둔 기사였죠. 그리고 2010년 3월 6일엔 BBC에서 에리트리아 반군들과 티그레안 인민해방전선이 어떻게 구호 기금을 털어서 무기를 구매할 수 있었는지 보도하지요.
그에 대한 밥 겔도프의 대답은 “그들과 협조하지 않으면 굶주리는 이들을 접촉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Live Aid가 전적으로 무용했다는 이야긴 아닙니다. 지상 최대의 쇼였고,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자선 행사기도 했어요. 하지만 어느 일이든 짬이 안되는 이가 결정권을 행사하면 배는 산으로 갑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만 가도, “선의가 세상을 망칠 수도 있구나”란 생각을 하시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첨바왐바 같은 이들은 밥 겔도프의 이런 활동을 두고 “자선을 갖고 장사를 하냐”고 비판하는 엘범을 냈지만, Live Aid의 성공에 혹한 서구 팝 스타들은 너도 나도 에티오피아 기근을 해결하겠다는 자선 공연을 엽니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구호물자를 에티오피아에 보냈죠.
여러분, 여기서 다시 지도를 보시죠. 지금은 에리트레아라고 부르는 나라가 1991년 에티오피아에서 독립한 곳입니다. 1985년 이전부터 이 지역은 에티오피아가 직접 통치하지 못하는 지역이었어요. 그러니 여기에 있는 아사브 항과 마싸와 항은 구호물자가 하역할 수 없었던 항구들입니다.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 사이에 있는 지부티의 항구는 어땠을까요? 여긴 프랑스 군이 주둔중인 곳입니다. 빌어먹을 공산당 정권이 엎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라가 구호물자를 우선적으로 하역하도록 도와줬을까요?
소말리아의 베르베라 항 정도가 그나마 에티오피아로 가는 물자들을 하역할 수 있었던 항구입니다만, 이 항구는 항구 크기가 600m 정도입니다. 연안 국가들만 돌아다니는 화물선 다섯 척이 동시에 접안하면 꽉 차는 곳입니다. 참고로 부산항은 대양 항해를 하는 201척의 배가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 더. 우리는 컨테이너를 기중기로 들어올려서 화물선에서 컨테이너 차로 옮기지만, 여긴 그런 시설도 없었어요. 컨테이너 문 따고 들어가서 사람들이 직접 내립니다. 그러니 부산항과 비교하면 화물처리 능력은 1/40이 아니라 거의 1/200 수준 정도라고 보면 됩니다.
물론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항구도 있긴 해요. 다만 소말리아는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을 벌였던지라 에티오피아로 구호물자를 보내긴 좀 껄끄러운 항구였습니다.
주요 항구들이 모두 처리 능력이 떨어지거나 구호물자 하역이 어려운 항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Live Aid의 성공 이후 에티오피아 기아 자선 공연이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엄청난 양의 구호물자를 실은 배들이 갔는데, 하역들을 하고 돌아온 겁니다. 좀 웃기지 않나요? 어떻게들 하역을 한 걸까요? 거기다 2015년 현재 에티오피아의 도로 포장률은 11% 정도에요. 거의 대부분이 비포장 길이라는거죠. 비포장길을 달리는 트럭들은 많은 양의 화물을 실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이 구호물자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사실은 이게 다른 비극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