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 70년 전 그날, 피로 물든 제주...누가 그들을 죽였나

in #kr7 years ago

7년간 이어진 ‘학살극’, 범인은 미국과 이승만이다

제주에는 음력 2월 초하루부터 보름날까지 변덕스러운 날씨가 계속된다. 이 기간 섬에 머물다 떠난다는 영등할망 때문이다. 제주 신화의 내용이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봄바람도 '4.3앓이'를 한다고 한다. 이 봄바람에 떨어지는 동백꽃은 70년 전 차가운 땅 위로 스러져간 4.3 영혼들을 상징한다.

일제가 물러간 뒤 38선 이남에 들어선 미군정과 친일·우익세력들의 탄압에 맞서 떨쳐나선 제주 민중들의 단독정부 반대 투쟁, 이 과정에서 국가 폭력에 의해 7년 동안 무고하게 희생된 수많은 민간인들이 있다. 이른바 4.3항쟁이 올해로 70년을 맞았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던 '4.3 진실규명' 요구는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으로 결실을 맺는다. 특별법은 4.3항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2003년 국무총리 산하 제주4.3위원회가 발간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좀 더 구체화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7년간 계속된 고통의 시간 속에서 3만여 명이 희생됐다. 당시 제주도민 전체 인구 중 10분의 1이 해당한다. 이후 고통 속에 살아간 유족까지 합치면 7만3천여 명(공식통계)이다. 이재민은 9만1천여 명에 달했다. 제주공동체는 철저히 파괴됐다. 이들은 필사적인 자기검열에도 불구하고 연좌제, 고문 피해로 인한 후유장애, 레드컴플렉스(적색공포)에 시달렸다. 피로 젖은 제주는 하소연할 곳도 없이 혼자서 아픔을 감당해야만 했다.

한국기자협회 소속 언론사 기자들이 제주 4·3평화공원을 찾았을 때 그 안을 맴돌며 우짖는 까마귀 떼를 만날 수 있었다.ⓒ김주형 기자

이들은 왜 죽임을 당해야만 했나

전국 70여 명의 언론인들은 지난 23일부터 24일까지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회가 주최(제주도기자협회 주관)한 평화기행에 참여했다. (주)제주생태관광의 진행으로 4.3평화공원과 곳곳의 유적지를 답사했다.

제주 명림로(봉개동) 오름 중턱에 위치한 4·3평화공원에서는 탁 트인 바다가 펼쳐져 보였고, 까마귀 울음소리가 방문객들을 맞았다. '순이삼촌'으로 유명한 4.3 작가 현기영의 '도령마루의 까마귀'가 떠올랐다. 산간의 들판 한가운데에는 수많은 표석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는 수많은 학살 피해자의 성명, 성별, 연령 등이 새겨졌다. 1~2세에 불과한 아이들이 부지기수다. 어린이·노약자·여성 피해자가 33%에 이른다. 시신을 찾지 못한 행방불명인을 기리는 표석도 3천895기나 된다.

특히 눈에 띄는 동상이 있었다. '비설'(飛雪)이라는 이름이 붙은 모녀상. 이곳 봉개동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이 이뤄지던 1949년 1월 6일 변병생(당시 25세)과 그의 두 살배기 딸이 토벌대에 쫓기던 중 총에 맞아 숨졌다. 후일 행인에 의해 눈더미 속에서 모녀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들을 기리기 위해 모녀상 주변에는 변 씨가 딸에게 미처 불러주지 못했을 자장가가 그 옆에 새겨져있다.

'웡이자랑 웡이자랑. 우리 아긴 자는 소리. 놈의 아긴 우는 소리로고나. 웡이자랑 웡이자랑…'

제주 민중들은 왜 들고 일어났을까

제주 4.3항쟁이 발발한 원인은 대단히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제주는 해방 이후 급격한 인구 급증과 높은 실업률, 흉작에 의한 식량난, 콜레라 확산에 의한 사회경제적 불안이 조성됐다. 특히 제주를 점령한 뒤 친일파를 재등용하고 '빨갱이 사냥' 조장하고 강경대응을 주도한 미군정과 유해진 제주도지사의 탄압적 행정, 극우집단 '서북청년단'(서청)의 각종 테러와 만행, 경찰의 고문치사 사건 발생 등은 제주 사회를 극도의 불안 상태로 몰아넣었다.

발단은 1947년 전국적으로 열린 3.1절 기념대회였다. 제주에서만 3만여 명의 인파가 모였다. 좌·우익 인사와 공무원들도 참가한 대규모 행사였다. 행사 직후 평화행진을 벌이던 중 현장의 기마경찰이 말발굽으로 어린 아이를 치고도 그냥 지나가는 모습에 분노한 군중이 항의하자 경찰이 발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일명 3.1사건). 결국 6명이 목숨을 잃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 희생자는 무고한 일반 군중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책임자 처벌이나 사과표명을 하지 않았고, 결국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민·관 직장인 95%가 참여하는 3.10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파업에는 166개 기관·단체의 4만1천211명이 참여했다.

제주도청 공무원 파업 요구조건

  1. 민주경찰 완전확립을 위하여 무장과 고문을 즉시 폐지할 것
  2. 발포책임자 및 발포경관은 즉시 처벌할 것
  3. 경찰 수뇌부는 인책사임할 것
  4. 희생자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생활을 보장할 것
  5. 3.1사건에 관련한 애국적 인사를 결속치 말 것
  6. 일본 경찰의 유업적 계승활동을 소탕할 것

제주 4·3기념관 전시실이 끝날 즈음 나가는 곳에는 ‘제주 4·3은 평화·통일·인권의 상징입니다’라는 글과 함께 벽 좌우와 위에 희생자 사진이 붙어 있다.ⓒ김주형 기자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빨갱이 섬)으로 규정한 미군정과 친일·우익세력

미군정은 즉시 카스티어(Casteel) 대령이 인솔하는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했고, 파업 원인에 대해 '경찰 발포로 도민의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킨 것'이라고 단정했다. 아울러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라고 보고서에 기술했다. 그 직후 조병옥 경무부장과 응원경찰 421명이 제주도에 급파됐고, 이틀만에 200여 명을 연행, 고문을 자행했다. 여기에 더해 악명 높은 서청 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와 각종 기관을 장악했다. 이들은 '빨갱이 사냥'을 한다는 빌미로 각종 테러를 일삼으며 경찰과 함께 1년간 2천500여 명을 잡아들였다.

"1948년 12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이 서북청년회 총회에 참석해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선 사상이 투철한 여러분들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동료들과 함께 제주도에 와 경찰과 군인이 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한 겁니다. 공산당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만 앞세워 현지 사정도 모르는 서청을 대거 투입한 것입니다." - 박형요,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 증언_(제주 4·3기념관 기록)

4·3유적지인 섯알오름 학살터(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있는 증거 인멸 장소. 이 기록에 따르면, 1950년 8월20일 새벽 군경이 주민들을 섯알오름으로 끌고가 학살했으며, 학살 이후 증거를 없애기 위해 고무신, 소지품을 불태웠던 장소이다.ⓒ김주형 기자

치솟은 항쟁의 불길

제주를 비롯해 3.8선 이남 지역을 군홧발로 제압한 미군정과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 준비를 밀어붙였다. 준비된 수순이었다. 결국 제주 곳곳에서는 저항의 불길이 타올랐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대는 한라산 중산간 오름마다 무장투쟁을 알리는 봉화를 피웠다.

무장대는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구호를 통해 자신들의 투쟁이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임을 내세웠다.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언급하며 분단 반대 원칙을 분명히 했다. 당시에는 좌익과 중도를 비롯한 우익의 김구·김규식 등 민족 지도자들도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시민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 제주도민에게 고하는 무장대 포고문

'살인극' 위해 손 잡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미군정은 군대(경비대)를 파견해 무장대를 견제하는 한편, 5.10 선거를 통해 성공적인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선거를 며칠 앞두고 제주 민중들은 선거를 거부하기 위해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산간지대로 도피했다. 결국 제주의 선거구 세 곳 중 두 곳이 과반수 투표 미달로 무효처리됐다.

이때부터 미국은 구축함을 급파하고 직접 진압작전 지휘에 나서는 등 학살에 앞장선다. 작전 지휘통제 임무를 띠고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미 제6사단 제20연대 연대장 브라운(Brown) 대령은 "(봉기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동시에 경찰과 서청 단원은 끊임없이 파견됐고, 도민들은 무차별적으로 체포됐다.

이후 본격적으로 벌어진 학살극은 잔악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제9연대장 송요찬은 "해안선에서 5km 내에 있는 사람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총살하겠다"고 선포했고, 이승만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제주도 사건의 여파를 발근색원해야 미국의 원조가 적극화될 것"이라며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고 힘을 실어줬다. 이승만의 발언은 제주 대학살이 미국과의 조율 속에서 이뤄졌음을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제주 4·3평화기념관 안에 있는 전시관 ‘역사의 동굴’에는 사진과 기록, 유품, 조형물 등이 전시돼 있다.ⓒ김주형 기자

이 학살은 '초토화작전'으로 불렸고, 항쟁 기간 희생자의 절대 다수가 이 작전에서 나왔다. 비극은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전쟁 때까지 이어졌다. 보도연맹 가입자, 항쟁 과정에서 토벌을 피해 입산했던 가족 및 요시찰자 1천120명이 1950년 7~8월 중 제주항 앞바다, 비행장,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대대적으로 집단 수장 또는 총살·암매장됐다.

"머흘곶에 한 사나흘쯤 숨어서 지냈어. 그러다가 배가 고파가지고 아무거나 찾아 먹으려고 나왔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 죽었지 뭐야." - 강춘부, 원동마을 생존자. 당시 17세

"총을 맞고 한 어멍(어머니)이 죽었는데, 뒷날 아침에 보니까 그 겨울에 애기가 살아가지고 젖을 빨고 있었어요. 이런 얘기가 아주 그냥 우리 마을에 허다했던 얘기요." - 김홍석, 의귀리 주민. 당시 11세

"내 눈 앞에서 5백명이 알몸으로 수장하는 것이 어제 일처럼 또렷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 장시영, 당시 군인_(이상 제주 4·3기념관 기록)

제주 4·3 당시(1947년 3월1일~1954년 9월21일)에 제주도에 있던 1백 곳이 넘는 중산간마을을 군경이 불태워 사라졌다. 당시 ‘무등이왓’(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어린아이가 무등을 타고 놀던 밭’이란 뜻)이란 마을 또한 사라져 현재 터만 남아 있다. 당시 11살 소녀 홍춘호(81) 해설사는 일가족과 함께 학살에서 살아남았으며, 이 마을에서 일어났던 학살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김주형 기자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인데 '폭도'라니…"

1948년 당시 11살이던 홍춘호(81) 할머니는 앞장서서 4.3 항쟁을 증언하는 생존자다. 토벌대에게 굴이 발각될 때까지 40일이 넘도록 어둠의 공포 속에서 숨어 살던 할머니는 무등이왓 초토화 작전 당시를 그린 영화 '지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기자들에게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입으로 받아먹기도 하고 바닥에 고인물을 빨아먹었다. 밥 같은 건 먹어본 적도 없고, 세수 한 번 못해보고 짐승같이 살았다. 아니, 짐승도 그보다야 낫지…"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우린 그때 폭도가 뭔지, 공산주의가 뭔지도 몰랐다. 우린 그냥 일반인인데 폭도라고 하면서 다 죽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할머니는 기자들 앞에서 환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래 살다 보니 이렇게 옛날 얘기를 다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할머니는 직접적으로 죽임을 당한 당사자의 유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했다.

제주 4·3 당시(1947년 3월1일~1954년 9월21일) 일가족과 함께 학살에서 살아남은 당시 11살 소녀 홍춘호(81) 해설사는 불탄 마을 ‘무등이왓’(1948년 11월 21일 불타 사라짐)에서 일어났던 학살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홍 해설사는 2시간 여에 걸쳐 기자들 앞에서 증언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다.ⓒ김주형 기자


일제침략기에 일제는 제주도에 알뜨르 비행장(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 근처)을 설치하고 비행장 곳곳에 풀 등으로 위장한 격납고를 지어놨다. 지난해 비엔날레 때 격납고 안에 철사와 천 등으로 비행기 모형을 설치작품으로 전시해 놨다. 알뜨르는 아래에 있는 들이나 벌판을 뜻한다. 제주에는 현재 제주공항에 있던 정뜨르 비행장을 비롯해 진뜨르 비행장(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알뜨르 비행장 등을 일제가 중일전쟁과 2차대전을 전후해서 설치해 군사기지로 만들었다.ⓒ김주형 기자

일제침략기에 일제는 제주도에 알뜨르 비행장(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 근처)을 설치하고 비행장 곳곳에 풀 등으로 위장한 격납고를 지어놨다.ⓒ김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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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영화보다 더한 실제.
들을 때 마다 가슴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