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과 게으름은 다르다
스스로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걸 자각한 의미에서의 성인이 된 후로 나는 항상 바쁘게 살았다. 거쳐온 어느 조직에서든 나는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였다. 설명해도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워 하는 극단적인 수면시간 관리법을 몇 가지 가지고 있었고 의도치 않은 시간의 소모에 과민해서 버스를 기다리거나 식당에 줄을 서는 것 같은 몇 분의 시간이 아까워서 늘 초조해했다. 취미나 여가생활은 외계의 일처럼 느꼈다. 특별히 여행은 더더욱. 이렇게 부지런을 떨며 살았던 시간들은 나에게 유익을 주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인생을 허비하게도 했다.
최근에 나에 대한 인식이 더 촘촘해지면서 내가 온갖 기행을 하면서까지 쉬지 않으려고 했던 건 사실 쉼이 게으름을 의미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란 걸 알았다. 나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싶은 욕구가 있었고 게으름은 그걸 방해할 수 있는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에 비해 항상 뭔가 뒤처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쉬지 않는 상황으로 내몰아서 ‘나는 게으르지 않다, 그러니 나는 성공을 향해 가고 있다’는 식의 자기 위안을 얻으려고 했다.
최근에야 쉼과 게으름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또 내가 허튼 가정—부지런하게 살면 게으르지 않다—을 가지고 열심히 레버를 뒤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주제에 대해 기록을 남겨 내가 알게 된 바를 더 명료하게 해두려고 한다.
부지런한데 게으를 수 있다
부지런히 산다고 해서 게으름으로부터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게으름은 흔히 떠올리는 것처럼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거나 주말 내내 소파에 누워서 티비를 보며 피자를 시켜 먹는 것 같은 행동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게으름이란 단지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거나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이다.
M.스캇 펙, 「아직도 가야할 길」, 최미양 역, 율리시즈, 2011, 393면.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변화가 요구되는 상황에 직면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해오던 것을 편안하게 느끼고, 그 상태를 고수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경우에 따라 잘못된 것을 알아도 고치고 싶지 않아 한다. 때로는 더 좋은 선택의 기회가 열려 있어도 늘 해왔던 부족한 것을 선택한다.
최근에 프로그래머인 친구가 설계 문서에 있는 변수명의 오타를 지적했더니 이미 코드를 작성한 다른 동료가 ‘다 같이 오타인 채로 쓰면 상관없을 텐데(왜 그걸 찾아서 고치게 만드냐)..’라는 불평을 사뭇 진지하게 했다는 이야길 들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무엇인가 나를 변화시켜야 하는 상황은 두렵다. 이 파괴적인 욕구는 그것을 충족하기 유리한 지위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어마어마한 크기로 커져 타인의 삶을 해하는 방향으로까지 뻗어 나간다.
따라서 게으름은 부지런함과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이대로 머무르는 데 도움이 되는 일, 나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들로부터 도망치는 일에 하루 종일 매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바쁘게 사는 것이 자랑이거나 습관이 돼선 안 된다. 지금 내가 직면해야 할 일을 피하느라 일부러 바쁜 체 하는 것이 아닌지 자성해 봐야 한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게 귀찮아서 야근을 하고 있다면 바쁘지만 게으른 것일 수 있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자고 일어나기도 벅차서 운동할 시간이 없다면 바쁘지만 게으른 것일 수 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회의 시간에 랩탑으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면 바쁘지만 게으른 것일 수 있다. 이런 구도를 깨달았다면 이제 제대로 된 부지런함과 제대로 된 쉼을 누릴 필요가 있다.
내가 생산적인 것처럼 느끼기 위해 시간 때우기로 주로 이용하는 세 가지 일은 무엇인가? 이 일들은 주로 실패하거나 거절당할 가능성 때문에 거북하게 느껴지는 더 중요한 일들을 미루기 위해 하게 된다. 자신에게 솔직해지자. 우리 모두 가끔 이렇게 하지 않는가? 당신이 중요한 일을 미루기 위해 일부러 하는 일은 무엇인가?
팀 페리스, 「4시간」, 부키, 2018, 113면.
쉬는 데 피곤할 수 있다
나는 쉬는 게 고역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크게 두 가지 패턴이 있었는데 먼저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차올라서 쉬고 있지만 무언가에 쫓기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주로 앞서 말한 게으름과 관련이 있다. 내가 해야 하는 어떤 일을 도피해서 비행적인(?) 쉼을 선택한 상황에서는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그것에 쫓기기 때문에 쉬는 행위는 할 수 있지만 쉼이 일어나진 않는다. 직면해야 할 일은 직면해야 한다. 도피성 쉼은 퇴행이거나 그냥 시간 낭비일 뿐 실제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주어진 일이 전혀 없을 때만 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순간은 죽기 전까진 오지 않는다. 다만 내 존재 이상의 창조를 이뤄내는 쉼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나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들 중에 몇 가지는 사실 쉼보다 가치가 적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선순위가 조정된다. 나는 쉼이 게으름과 다르며 굉장히 창조적이고 성과 있는 활동임을 알게 됐다. 이 정도면 쉼은 나의 연간, 월간, 주간, 일간 계획에 꼭 포함해야 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언젠가 이것에 대해서도 내가 나름의 기록을 남길 수준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우선순위가 높은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한 다음 다른 일들에 대해서 좋은 말로, 그러나 변명이 되지 않게 “못 한다”고 말할 용기도 가져야 한다. 그런 용기는 '우선순위가 높은 것부터 하겠다'라는 내면의 강한 결심에서 나온다.
스티븐 코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법칙」, 김경섭 역, 김영사, 2017, 250면.
두 번째로 쉼을 고역으로 만드는 패턴은 욕구에 연결되지 못한 쉼이다. 간단히 말하면 ‘무엇을 하면서 또는 하지 않으면서 쉴 것인가’에서 자신의 욕구와 연결되지 못한 선택을 하는 경우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내도 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말하는 ‘만취 상태로 보내는 기나긴 주말’이 이런 건가 싶은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풍족하고 여유롭지만 정말 피곤하고 무의미했다. 내 욕구에 연결된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회사를 옮기면서 생긴 한 주의 무직 기간을 위해 나는 계획서를 썼다. 2개의 온라인 강좌를 이수하고 한 권의 책을 읽고 아내와 그동안 단둘이 가보지 못한 곳들을 가보고 간단한 수술을 받고 쇼핑을 하고 아린이와 하루를 온전히 데이트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14개의 크고 작은 계획이 있었는데 그중 10개를 실행했고 계획되지 않았던 몇 가지도 더 추가됐다. 이직 텀을 왜 그렇게 쉬지 않고 보내냐는 질문을 몇 사람에게서 받았는데, 아니다. 나는 정말 잘 쉬었다. 나는 이것들을 정말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쉽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피곤한 이유는 해야 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해야 하는 일은 내 욕구를 무시하고 억눌러야 하기 때문에 피로감이 쌓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는 내 존재가 숨을 쉬고 활기를 얻는다. 그러니 쉰다고 해서 굳이 남들이 쉴 때 하는 행동을 찾아서 똑같이 따라 할 필요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을 하는 게 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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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내가 스스로를 매어 놓았던 바쁘고 피곤한 삶은 이런 사실들을 깨닫게 되면서 구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게으름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니 쉼에 대한 지평도 더 넓어졌다. 평일에 대한 보상심리에 주말에 늦잠을 잤던 건 평일보다 한 시간 더 자는 수준에서 내가 더 행복하고 더 잘 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회의 시간에 조금 더 일찍 들어가서 명상을 하고 회의를 맞이하는 것이, 퇴근 후 아이들과 있을 땐 소파에 누워서 시간을 때우기보단 아이들이 좋아할 만 한 활동을 찾아서 함께하는 것이 나에겐 오히려 쉼이 된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앞으로의 나도 여전히 바쁠 것 같다. 아주 바쁘게 쉬는 것이다.
아..!휴식에 대해서 재정의를 해볼수 있었습니다. 저도 아무생각없이 주말을 보낸 후에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적이 많은데 , 쉼에 대한 정의를 잘못 내리고 있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팔로우할게여!
감사하고 부끄럽습니다아- 저도 이제 알게 됐으니 꾸준히 노력해나가려구요! 큰 격려가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