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커뮤니케이션 - 지시에서 위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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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에서 일하며 나는 가끔,
상사와 스무 고개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라는 일을 하고 있지만 몰입하지 못하고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다.
일을 제대로 하려는 생각보다는 상사의 반응이 어떨지에 더 집중하고 있다.
피드백을 듣고 있으면 ‘그럴 거면 자기가 하지 왜 날 시켜?’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건 나만의 상황은 아닐 거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거의 모든 조직에서 비슷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이 불만족감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내가 상사를 잘못 만나서..’의 결론에 도착한다. 그러다 문득, 같은 상사 밑에서 나보다 더 오래 버틴 동료들을 떠올리면 겸허한 맘이 되어선 ‘내가 내공이 부족해서’가 되기도 한다. 뭉툭한 이 결론은 일종의 귀인오류인데,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조상들의 지혜를 마주하게 만든다. 얼마 전에도 들은 이 격언은 친한 동료들끼리 술을 마시며 끝없이 터져 나오는 회사 욕으로 탈진이 되어갈 때 쯤 찬물을 붓고 (주로 연애나 여행으로) 주제를 전환하기에 적격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정말 각자에게 맞는 절을 찾아 나서면 될 일일까.
이 글에서 ‘지시’라는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중심으로 수직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편함의 원인을 비춰보려고 한다. 표면적인 대화 기술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지시에 관한 문제를 파고들면 결국은 조직 안의 역학을 파악하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시에서도 지난 글에서 살펴본 기본적인 대화의 원리들이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목적이 빠진 지시
지시는 타인의 시간을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하게 한다. 그런데 만약 이 과정이 길고 번거롭다면 지시를 통해 얻는 시간적 이익이 감소하므로 자연스럽게 지시에 드는 시간을 줄이려는 경향이 생긴다. 그러다보니 왜 이 일을 지시하는지에 대한 공유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창고에 가서 연장선 좀 가져와봐”
“지금 최신 버전 사용자가 어느 정도인가요?”
앞의 사례는 오래전 어느 행사에서 음향 장비를 세팅할 때의 일이다.(그런 잡일도 했다) 이것저것 나르는 중에 멀리서 매니저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창고에 가서 5미터 정도의 멀티탭을 가져갔는데 실제로 한 대 맞을 뻔한 기억이 난다. 가서 보니 2-30미터 정도 되는 전기 릴선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나도 물론 다른 이유에서 어이가 없었다.
두 번째는 새 버전의 서비스를 배포한 며칠 후인데, 지시한 대로 자료를 뽑아 주긴 했지만 재차 질문과 요청이 추가되었다. “사용자는 활성 유저 단위인가요?”, “직전 버전 사용자는 어느 정도인가요?”, “리뷰에서 반응은 어떤가요?” 등이다. 나는 메신저로 답을 주긴 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한 매락에서 질문이 반복되니 짜증이 솟구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새 버전에 들어간 기능을 활용하고 싶은데 언제쯤 가능할지 업데이트 추이를 보려는 의도였다.
위의 지시들은 목적—여기선 지시하는 사람의 의도, 그 일이 주어진 이유, 그것을 통해 성취하려는 욕구 등을 통틀어서 목적이라고 부르겠다—이 빠진 문장이다.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형태가 되어야 할 문장에서 목적을 담는 후반절이 없어진 상태다. 이것의 문제는 앞서 쓴 글에서 많이 다루었다. 욕구가 빠진 언어는 대화를 피곤하게 할 뿐 아니라, 대화를 통해 목적했던 욕구 충족을 오히려 방해한다.
결국 두 사람은 나를 통해서 원하던 걸 얻긴 했지만 서로에게 소모적인 시간을 얼마간 더 보내고 짜증스러운 상태에서였다. 지시하는 말에 애초에 목적에 대한 설명이 잘 담겨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 더 협력적이고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대를 분명히 하는 것은 때때로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사전에 의견 차이를 해결하고 서로 협력하여 납득할 만한 기대치에 도달하는 것보다는 마치 의견 차이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일이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스티븐 코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김경섭 역, 김영사, 2017, 305면.
지시를 하려거든 목적을 설명해주어야 한다. 지시를 받으려거든 목적을 물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투여되지 않으면 나중엔 더 큰 것으로 갚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지시에 관한 절반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방법이 정해진 지시
2014년, 코네티컷의 한 고등학교가 보수적 성향의 웹사이트에 대한 인터넷 접속을 차단했다. ... 이 조치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당신에게 자율적 사고는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당신 대신 생각하겠다.” … 내가 옹호하는 것은 비판적 사고와 자유롭게 검토할 자유다. 그 두 가지가 있어야 당신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엠제이 드마코, 「언스크립티드」, 안시열 역, 토트출판사, 2018, 53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자신의 능력이 상대방의 능력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수록 더 구체적인 방법이 담긴 지시를 하게 된다. 또한 제시된 방법을 따르게 하려는 강제성도 커진다.
“다들 하고 싶은 말들이 있을 텐데 지난번에 제가 만든 것처럼 시트 하나 추가해서 피드백을 수렴하도록 해요.”
“왼쪽에도 뭔가 있다는 걸 암시하도록 화살표를 하나 넣어주세요.”
이런 지시들은 방법이 정해져 있다. 전자의 경우 내부의 의견을 수렴하여 서비스에 반영하고 싶다는 배경은 공감된 상태였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결국 ‘요즘 세상에 대체 왜 엑셀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투덜거리며 시트를 만들었다.(물론 제대로 활용이 되지도 않았다) 후자의 경우 고객들이 착오하지 않도록 돕고 싶다는 의도는 공감이 되었지만 그걸 위해 화살표를 넣으라는 지시는 석연치 않았다. 더 좋은 방법들이 머릿속에 5가지는 떠올랐으니까.
이런 방법이 정해진 지시들 역시 서로를 피곤하게 만들고 목적을 성취하는 걸 방해한다. 지시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실현해주는 도구로 전락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참여감도 느끼지 못한다. 흔히 하는 말로 영혼이 없어진다. 단순히 감정적인 차원에서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런 지시 패턴은 부하직원의 능력을 상사의 사고 범위 안에 가둔다. 따라서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 들어와도 상사 개인의 수준 이상으로 조직이 발전할 수 없다.
물론 지시된 방법에 대해 이견을 밝힐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방법을 포함해 지시한 경우, 지시한 사람은 이견에 대해 방어적이 되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증명하려는 반작용이 형성된다. 심하면 부하직원과의 경쟁 구도로 발전해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덧붙이거나 제3의 권위자를 팔아서라도 자기 의견을 관철하고자 한다.
지시를 하려거든 방법에 대해서 열려 있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지시한 방법이 아무리 최고의 방법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참여하지 않은 결정에는 헌신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데서 오는 더 큰 시너지를 경험하기 원한다면 모두의 사고와 판단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지시에서 위임으로
그러나 뛰어난 문제 해결사는 타인의 능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처방을 내려주거나(극복 방법을 알고 있다면), 그가 직접 해결책을 찾도록 도와준다. 예컨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한다. 탁월한 해결사는 상대방과 협력해서 장애물을 극복한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성급하게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타인을 참여시킨다.
-조셉 그레니, 케리 패터슨, 론 맥밀런, 알 스위즐러, 「결정적 순간의 대면」, 김경섭 역, 김영사, 2008, 205면.
앞서 다룬 모든 제언을 적용한다면 이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는 이제 지시라고 부르기가 어색할 것이다. 나는 지시의 올바른 형태는 위임이라고 생각한다. 위임이란 주제도 후에 더 다룰 수 있으면 좋을 듯한데, 일축해서 위임은 타인의 사고력과 판단력을 존중해야만 가능하다. ‘그가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믿는 수준을 넘어 ‘나처럼 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에 가깝다.
스티븐 코비는 이것을 ‘신임적 위임’이라고 불렀다.
신임적 위임은 방법이 아닌 결과에 초점을 둔다. 이것은 위임받은 사람이 방법을 선택하고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스티븐 코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김경섭 역, 김영사, 2017, 274면
여기서 ‘결과에 초점을 둔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결과에 초점을 두지 않을 때 방법에 집착하게 된다. 최근에 소개받은 한 팀의 매니저는 “과정은 보지 않는다. 단, 결과가 좋지 않을 때만 과정을 살펴본다”라는 조직 관리 원칙이 있다고 했다. 분명한 목표 인식과 신뢰 위에서만 적용이 가능한 원칙이다. 매뉴얼만 따라가면 목표는 이루지 못할 수 있다. 매뉴얼은 방법에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확한 목표를 바라보고 있다면 방법은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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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심리학의 센스메이킹(sensemaking)이란 개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센스메이킹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그 상황을 정의하고 행동을 하느냐에 관한 것인데, 이 센스메이킹의 주된 재료는 경험이라고 한다. 과거에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면 현재의 상황도 그에 비추어 해석하고 적절한 반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사회가 급변하고 이전에 없던 다양한 변수가 개입하면서 경험에 의한 센스메이킹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이제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현 사회를 경험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문제가 다각적으로 조명되어야 답을 찾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런 사회의 변화에 따라 조직의 변화도 빠르게 요청될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목적으로 연대한 가운데 각 개인의 창의적인 접근을 허용하는 위임의 기술은 아마도 앞으로의 조직에서 더 필수적인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