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과 미스테리
냉전과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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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신냉전'이라는 말이 피부에 와 닿는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동방과 서방의 대결은 아니지만 전체주의 국가 비스무리하고 덩치 큰 아시아와 유럽의 땅덩어리 러시아와 중국이 한편에 서고, 유럽과 미국이 그에 맞서는 가운데 각 나라들이 어느 편에 설지 주판알을 튕기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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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주판알은 단순한 이익만이 아니라 피와 땀의 무게를 결정하기도 한다. 한국 전쟁이 내전임과 동시에 냉전 양대 세력의 대리전이자 국제전이었던 것처럼. 각자 자신들의 처지와 이해 관계에 맞게 군대를 보내고 챙길 것 챙겼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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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칼같이 갈라서고 맞서다 보니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많이 벌어졌다. 자기 마누라를 죽여 놓고 피해자를 간첩으로 몰아붙였던 망나니도 있었고, 동구권에서 열린 스포츠 경기를 취재갔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 끝내 나타나지 않은 기자도 있었으며, 쌍방간에 귀신도 울고 갈 첩보전도 펼쳐졌다. 대결의 경사가 가파를수록 미스테리의 깊이는 더해갔다. 대한항공이 겪었던 세 번의 참사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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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의 KAL 858편은 범인이 잡히면서 그나마 전모가 밝혀진 셈이다. KAL 858 폭파범 김현희는 동료 공작원 김승일과 함께 비행기에 폭탄을 설치했다. 대체 북한이 그때 왜 그런 짓을 했겠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겠으나 김현희가 잡히지 않았다면 하는 가정을 해 본다면 그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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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은 범인이 누구인가를 두고 일대 논란에 빠져들었을 것이고, 남한행 비행기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올림픽도 무사하기 어려웠다. 상대방의 혼란을 위해서라면 사람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았던, 냉전의 논리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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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78년의 KAL 902편과 1983년의 KAL 007편의 미스테리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기존 항로와 엄청나게 벗어난 항로를 날았던 이유에 대해서 KAL 902편의 항법사와 기장, 부기장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KAL 007의 경우 관성항법장치를 끄고 나침반에 의지하는 비행을 감행했다고 보이는데 그 이유는 후일 소련이 돌려 준 블랙박스에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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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건 서방 세계 (유럽, 일본)가 이 비행기들의 항로를 낱낱이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조종사 실수든, 계기 이상이든 기이한 항로를 보이는 비행기들을 그들은 뻔히 추적하고, 소련측의 반응까지도 체크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행기들은 어떤 경고도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지만 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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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 902편의 이야기...... 이런 '냉전의 시대'가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