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돌아보기 2 - 슈퍼우먼 어머니

in #kr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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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돌아보기 2 – 아버지의 유학과 슈퍼우먼 어머니
주: 아버지의 기록을 제가 정리하고 덧붙인 것이며 여기서 '나'는 제 아버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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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태어난 곳을 남양으로 여지껏 읊고 있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이다. 온성군은 한국 최북단의 지명이다.한반도 지형을 토끼로 묘사하자면 길쭉한 귀의 끄트머리에 붙은 곳이고 호랑이로 보자면 만주를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의 오른쪽 앞발톱이다. 여기서 부산 수영천보다도 폭이 좁을 때가 많은 두만강을 넘으면 오늘날의 연변 자치구, 과거의 기억으로는 도문,용정 등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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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겁지겁 피난 나오다시피 건너온 식민지 조선 땅 남양에서 아버지는 교회 전도사 자리를 얻었다. (할아버지가 개신교로 개종한 이래 아버지는 독실한 신자였고, 목회자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맏이였던 옥자 누나, 동희, 동식 동훈 형제가 그 슬하에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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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여동생 둘이 더 태어나지만 나는 꽤 오래 막내로 자랐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인 나를 특히 사랑하셨다. 말문이 트이고 사람들 얼굴을 구별하게 될 즈음부터 아버지가 나를 아낀다는 느낌을 받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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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은 한반도 최북단이고 겨울에는 매섭게 추운 고장이었지만 여름이 되면 무척 더웠다. 후일 지리 시간에 배운 대륙성 기후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후일 남쪽으로 왔을 때 제주도와 거제도에도 있었고 대구에서도 오래 살았고 부산에 터를 잡았지만 남쪽 더위가 함경도 더위보다 더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당연히 모기도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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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덧 살쯤 되었을까. 나는 모기 때문에 지독히 괴로워했다. 귓전에 앵앵거리는 모기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었고 온몸이 가려워 북북 긁다가 울었다. 어느 여름밤 아버지가 모기 때문에 악악거리는 나를 불렀다. 형들은 모기가 물건 각다귀가 뜯건 잠만 잘 자는데 이놈의 막내는 참 유난하구나 싶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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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부채로 모기를 쫓으며 재웠다. 아느날 동이 트고 문득 깨어 보니 아버지는 밤새 한잠도 주무시지 않고 부채를 부차고계신 것이 아닌가.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감사했던지...... 나를 재우며 할아버지는 나지막하게 노래를 불러 주셨다. 기억나지 않는 자장가도 있지만 아버지가 부르던 독립군가도 있었다. 잠자리에서 뿐 아니라 평소 교회 일 마치고 들어오시면 반겨 안기는 나를 무등태우고 흥얼거리신 노래였다. 그 가사는 지금도 선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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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대판 깍닥빠리 (게다 소리를 비꼬는 듯) 왜놈 아이야
껍질 문명 하였다고 자랑말아라
충무공의 거북선이 둥둥 뜬곳에
함몰하여 다 죽다가 남은 종자다
사나이 가는 앞길이 태산과 같이
험해도 승전가를 울러매고 나아갈때에......(이후 가사 기억 못함)
만주국도 아니고 엄연히 일본 땅이었던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에서 코흘리개 아들에게 이런 노래를 흥얼거리게 만드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 독립군 활동을 했어도 그 이후로는 열렬히 항일운동에 가담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이 노래를 부를 때 아버지는 힘에 넘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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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두만강 일대 즉 도문, 용정, 그리고 조선 땅 온성,회령, 경흥,무산 등은 일본 경찰 보기에 심히 좋지 않은, 즉 ‘불온한’ 동네였다. (아들 주 : 1937년 1월 식민지 조선에서 외사경찰과가 처음 신설된 것은 경기도, 그리고 함경북도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아버지도 이 노래를 대놓고 가르치고 나 역시 지금 이 나이 되도록 기억할만큼 많이 부르고 다닌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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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집을 떠났다. 어머니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당신, 목사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당신 여기서 전도사 노릇하는 것도 좋지마는, 사람이라는 거이 공부도 하고 내세울 것도 있어야 사람들이 알아주는 법이오. 일본 신학교에 유학을 가시오.”
“무스근 소리를. 그럼 이 아이들은 당신 혼자 건사하갔소.”
“못할 것도 없지 않소. 당신은 그저 공부 해서 목사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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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우리집 살림은 어머니가 거지반 책임을 졌거니와 아버지는 돈 버는 데에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다. 성실하고 반듯하고 자식들 사랑하고 신앙심 깊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유능하지 못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호수돈여학교 개성 여학교로 처음 섰던 게 1899년이고 호수돈 여숙 고등과가 1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게 1913년의 일이니 호수돈 여학교를 졸업했다면 당시 여성으로서는 꽤 또르르한 엘리트 여성이었을 것이다. 혈혈단신 황해도 재령 고향을 떠나 두만강 너머 용정에서 자기 힘으로 일하며 먹고 살았던 분이니 비 기다리는 천수답처럼 남편바라기할 처지는 아니었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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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역의 어머니들이 연약하랴마는 함경도 여성들의 생활력은 굉장했다. 예로부터 함흥 이북 특히 마천령 산맥 이북은 적어도 남도 사람들에게는 유배지나 군사기지 이상의 의미는 적었던 변방이었다. 조선 시대 영토 개척을 하며 사람들을 옮길 때에도 두만강변로 보낼라치면 반발이 심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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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람들은 터를 잡았고 두만강 이남에서 못살겠으면 두만강 넘어 북간도에서 땅을 일구고 논을 만들어 (그 위도에서 쌀농사라니) 먹고 살았다. 이렇게 기구하고 박복한 역사를 지닌 곳이기에 함경도 사람들은 생활력 강하고 기질이 굳세기로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도 함경도 여성들은 한 수를 더 떴다고 한다. 남쪽 지역 여성들이 장터에 나서지 못하고 야시장에 구경꾼으로나 기웃거리던 시절에도 함경도 시장은 거의 여성들로만 북적거렸다고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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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여성은 함지를 잘 이는 것이 특징이었다. 함지에는 콩, 팥, 귀리, 강냉이, 좁쌀 같은 곡물은 물론이고 계란, 생닭, 어물, 각종 채소나 과일 등 별의별 것을 다 담았다. 돼지 새끼까지 끼고 다니면서 파는 여자도 있었다. 물건을 “산더미 같이 인 중에도 아이를 또 업고 안고서 맨발로 큰 산과 물을 건너 30, 40리 혹은 50, 60리를 어렵지 않게 다니는 것”이 함경도 여성이었다."(우리역사넷 시장 잘 보는 함경도 여성,허영란)
어머니도 그랬다. 황해도 사람이지만 이미 함경도 어머니들도 혀를 내두를 억척이였고 슈퍼우먼이었다. 시장에 함지 이고 나가 장사를 했고 학교에서 배운 실력을 살려 산파 노릇 하며 곳곳에서 태어나는 아이들 받아내면서 돈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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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버지의 유학 경비를 대고 참새 새끼들 같은 4남매를 살뜰히 거두었을 뿐 아니라 상당한 재산까지 모았다. 두만강 너머에 몇 뙈기라도 되는 땅까지 장만했었으니 어머니의 수완은 실로 대단했다 할 밖에. 아버지의 유학 기간은 2년 정도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쉽다. 그 유학 기간이 길어졌다면 우리 집은 어쩌면 떵떵거리는 땅부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긴 그래 봐야 그 피땀흘린 재산 중국에 북한에 놓아 두고 평생 배 아파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2년 뒤 아버지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