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명품

in #kr4 years ago

아내의 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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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장점은 많지만 그 중 하나는 사치를 별로 모른다는 것이겠다. 연애할 때부터 지금까지 비싼 물건, 특히 ‘명품’같은 걸 사달라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내 기억에 가장 비싼 ‘선물’은 이화여대 근처 가게에서 샀던 겨울 부츠였다. 한 25만원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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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뭘 사거나 걸치고 와서 “이거 얼만지 알아?” 물을 때는 적당히 답해 줘야 한다. 한 10만원? 부르면 “만원이야!”하고 활짝 웃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야 분위기가 좋아진다. 괜히 “만원짜리야?” 그랬다가는 급격히 형성된 시베리아 고기압이 시무룩셈부르크를 지나 우라질을 거쳐 우리 집 안방에 상륙하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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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바자회에서, 또는 노점에서, 백화점 매대에서 싸게 산 걸 휘감고도 아내는 옷 잘 입는다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봐도 그렇다. 이른바 명품 옷들은 하나도 없고 소위 메이커 옷도 셀 수 있을 정도고 처녀 때 옷을 지금까지 입는 괴력을 발휘하면서도 아내는 수수하지만 깔끔한 옷맵시를 보인다. 메이커를 걸쳐도 6.25때 중공군 같고 생애 처음 명품을 입은 날 (돌아가신 이모의 대학 졸업 선물) 아르마니를 입고 족구하고 막걸리 질질 흘리고 들어간 나와는 좀 차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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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가 나오거나 뜻하지 않은 수입이 있을 때 맘대로 쓰라고 얼마를 헌납했을 때에도 아내는 자신을 위해 뭘 산 적은 없다. 가방은 교회 바자회가 주 공급 루트인 것으로 알고 있고 장신구 또한 그러하며 옷은 백화점 매대나 지하상가 할인 코너에서 주로 구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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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이들 물건 사느라 백화점에 가면 우리 부부가 공히 하는 일 중의 하나는 가격 보고 감탄하기였다. “우와 백만원 미쳤다 미쳤어.” “우와 뭔 가방이 삼백만이야. 돌았다 돌았어.” 아내가 공식적인 수입 (내 월급이든 아내 수입이든)으로 ‘명품’을 사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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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7일은 아내의 생일이었다. 생일을 맞아 온 가족 4명이 평창의 아담한 호텔에서 1박하며 볼링도 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생일파티도 했다. 그런데 아들이 이런 말을 한다. “엄마 선물은 내일 집으로 올 거야.” 그래서 뭔 선물을 준비했냐고 하니 무슨 무슨 상표를 대며 아주 비싸지는 않아도 ‘명품’에 해당하는 브랜드의 목도리라고 한다. 아니 네가 무슨 그런 걸? 하며 놀라자 아들이 무뚝뚝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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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명품 같은 거 하나도 없잖아. 젊어서는 괜찮아도 나이 들면서는 그래도 하나씩은 있는 게 좋대. 그래서 알바한 걸로 명품 좀 아는 친구한테 물어서 적당한 거 골랐어. 00000 라고.” (나는 지금도 그 상표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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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대견함 반 난처함 2/3, 미안한 1/3의 오묘한 심경이 돼서 너스레를 떨었다. “야 엄마도 명품 하나 구비하겠네. 근데 엄마는 아빠가 명품 같은 거 사오면 반품하라고 그럴 거야. 그래서 뭐.......” 여기서 설경구가 천정에서 튀어나와 기관단총을 난사하며 “비겁한 변명입니다.!” 부를짖을 것 같아서 온몸에 닭살이 돋는 차에 딸이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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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 딸내미가 아빠를 부를 때는 어조가 확연히 있다. 뭘 부탁하거나 할 때의 어조는 부드러운 에스컬레이터다. 아...빠에서 ‘빠’에 액센트가 있고 장모음이다. 그런데 불만을 제기하거나 따지거나 할 때는 ‘빠’는 두부 써는 것 같은 단모음으로 잘리면서 액센트가 데크레센도다. 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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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안 사줘 봐서 그래. 엄마가 말은 뭐 이런 걸 사왔냐고 막 화내겠지. 이 돈으로 뭘 할 수 있는데 이거 저거 따지면서 당장 바꿔 오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근데 진짜로 그렇게 할 것 같아? 아냐. 정말로 그런 거 싫어할 것 같아? 아냐. 아빠는 참 몰라요. 아빠가 그런 거 하나 사주면 엄마는 엄마 성격에 자랑도 대놓고 못하면서 어떻게 자랑을 은근히 할 수 있나 밤새 고민할 거라고. 차암 어쩌면 이렇게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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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졸지에 나는 우리 가족에서 가장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 얘기를 들으면 또 딸과 아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원래 그랬어. 되긴 뭘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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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족 단톡방에 아내가 아들 목도리를 하고 외출한 사진이 올라왔다. 누군가를 만나고 아주 은근히, 조심조심 아들이 사준 ‘명품’임을 자랑하느라 고충이 클 것으로 짐작한다. 이번 결혼 기념일에는 ‘명품’을 하나 골라야 하나 고민이 생긴다. 근데 그랬다가는 쓸데없는 짓 한다고 혼날 것 같아 걱정도 되고,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바가지가 아닌지 등의 정보는 원시인의 원자로 이해보다도 적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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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그래도 엄마한테 현금으로 뭘 사라고 준 적은 있다고 변명했을 때 딸은 이렇게 오금을 박았었다. “그걸 돈으로 주면 엄마가 잘도 사겠다. 츠암 나...... ” 응 그렇구나. 그럼 나더러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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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가족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