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단편] Deactivate account (下)

in #kr7 years ago (edited)

오랫만에 꿈을 꾸었던것 같다. 꿈에서 나는 아름답고 싱그러운 식물들과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호수가를 거닐고 있었다. 눈을 감고 손을 가만히 뻗어 걸어가면 손에 풀들이 만져졌다. 그 풀들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따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풀들에 맺혀진 이슬들의 서늘함이 너무 좋았다. 시원했다.

"쿵! 쿵! 쿵!"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아니 사실 그 소리는 아까전부터 반복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똑똑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였지만 점점 소리가 규칙적으로 꺼지고 있었다. 나는 꿈에서 깨기가 싫어 잠을 깨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커졌을 때에야 나는 거칠게 이불을 걷어 차며 일어났다.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얼굴엔 오만상 짜증을 나타난 채로 문을 벌컥 열어 제쳤다. 문밖에는 아파트 관리 로봇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주무시는데 죄송하지만 꼭 전해드릴 메세지가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일이야?"

"제가 계속 메세지를 보내드렸는데 읽어 보시질 않았더군요. 아시다시피 이 아파트가 곧 정리 구역에 포함되어 조만간 철거될 계획입니다. 그 전에 집을 비워주셔야 합니다."

"알았어..."

"시청에서도 계속 크리스님이 전환 대상자라고 메세지가 오던데요. 어서 전환 신청을 하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귀찮으시면 제가 대신 신청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신청만 하면 바로 시청에서 차량이 보내지니까요."

"알았다니까!"

관리 로봇의 말을 자르고 문을 확 닫아버렸다. 귀찮고 짜증이 났다. 소파에 한참을 멍하게 앉아있다가 컴퓨터를 켜기는 싫어 TV를 켜보았다. 구닥다리 인공위성 채널 수신 TV라 그런지 이제 남아있는 채널은 전파 송신 시험 채널과 공영방송 채널 1개밖에 없었다. 공영방송 채널에서는 끊임없이 부적응자들에게 전환 신청을 하라는 공영 캠페인이 방송되고 있었다.

정부보다 페글과 같은 기업의 권력이 더 커져 세계 정부가 출범하자 전쟁이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석유 등 화석 에너지 자원이 줄어들고, 인류의 평균 수명이 길어져 식량 생산과 공급이 큰 문제가 되자 세계 정부는 "인류 전환 프로젝트"를 가동하였다. 인류가 엔트로피를 끊임없이 증가시켜온 탓이었다. 물론 태양 광선을 전력화하는 태양 발전 시스템의 효율이 많이 증가하였으나, 세상의 수많은 온라인 서버들을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곳에 태양 전지를 설치해야하고 이는 식량 생산 면적을 줄여야하는 문제를 불러왔다. 그래서 식량 생산 면적을 줄이고 태양 발전 면적을 늘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한 끝에 나온 것이 바로 "인류 전환 프로젝트"였다. 모든 사람들의 뇌만을 수용하는 두뇌 수용 센터를 지하에 만들어 거기에 대부분의 인류를 수용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렇게 하면 최소한의 전기 에너지를 갖고 인류를 수용할 수 있으며, 넓은 면적에서 식량을 생산할 필요도 없고, 그 땅들에 태양 발전소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 중 극소수는 이러한 전환 프로젝트를 거부하고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대신 그들에게는 정부의 모든 식량 공급과 온라인 네트워크 접속이 허용되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배후에는 페글의 강력한 AI 시스템이 이러한 지구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향후 몇 백년 내에 인류가 멸종한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통보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한참을 멍하게 TV 화면을 멍하게 지켜보던 나는 더이상 화면속의 캠페인 광고를 쳐다보기가 역겨워졌다. TV 속 남녀들은 끊임없이 지긋지긋한 현실 속의 육신을 버리고, 즐거움만이 가득한 온라인 네트워크의 세상에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더 쳐다보다가는 구토가 나올것 같다. 소파 옆 테이블에 놓여 있는 커피잔을 손을 더듬어 찾아내 TV 모니터를 향해 던져버렸다. TV는 스파크를 조금 내고 연기를 조금 내더니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방안은 완전한 암흑이 되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헤드셋을 끼고 네트워크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계정 설정에서 복잡하게 숨겨져 있는 Deactivate account 버튼을 겨우 찾아내었다. 몇 가지 복잡한 신원 확인 절차를 거쳐 "정말 계정을 폐쇄하겠습니까? 이러한 조치로 인해 당신은 모든 온라인 사회 활동이 정지될 수 있습니다!"란 경고 메세지를 받았다. 한번 심호흡을 하긴 했지만 나는 별로 주저하지 않고 단호하게 Yes를 눌렀다.

플라스틱 물병에 든 꽃을 한손에 거머쥐고 나는 오래된 아파트를 떠나 길을 나섰다. 오래전부터 식량과 여러 가지 종류의 식물 종자를 준비해두긴 했지만 솔직히 두려움이 더 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절대 어두컴컴한 지하의 두뇌 수용 센터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사막 한 가운데서 외로이 목말라 죽더라도...

그로부터 몇 십년 후, 거의 대부분의 인류는 두뇌 수용 센터에 뇌만이 수용되었고, 페글의 인공지능 시스템은 지구 표면 대부분에 태양 전지판을 설치하여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이른바 인류가 늘 그려오던 유토피아가 가상의 세계에서 실현되었다. 그 유토피아에서는 배고픔도 없고, 전쟁과 질병도 없고, 노동과 죽음도 필요 없었다. 또한 별다는 오염없이 영원히 생산 가능한 태양광 발전을 통한 에너지만으로도 인류 대부분이 가상 세계에 존재하여도 충분히 넉넉한 전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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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http://www.paperblue.net)

그러던 어느 날 남태평양에서 대규모 화산이 폭발하였다. 지구 역사상 가장 큰 화산 폭발로 인해 화산재는 온 지구를 뒤덮기 시작했다. 지구 대기면의 80%가 컴컴한 화산재로 뒤덮여 태양광 발전이 힘들어지자 AI는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 현재 상황으로 가면 지하의 두뇌 수용 센터는 물론 전체 시스템 전체가 전력 부족으로 다운될 위기에 처하였다. AI는 약 0.29초의 연산 끝에 두뇌 수용 센터의 전력 공급을 중단하였다. 전체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의 비상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22세기의 어느 날 인류는 그렇게 단 하루만에 멸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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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참에 장편을 한번 써보심이..

그럴만한 내공이.. ㅎㅎㅎ

잘 봤습니다. 결말이 인상 깊네요. (역시 저 시대에도 열 받으면 TV를 향해 뭔가를 던지는군요)

열받는거 푸는 것도 VR에서 뭔가 때려 부수는 걸로 대치될려나요?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