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와 삶에는 죽음이나 세금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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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하며 살다 보면 이런 일이 분명하게 생긴다.

1.계속 눈높이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1955년 중산층 가정의 연평균 소득은, 물가 상승률을 감안해 현재 기준으로, 29,000달러였다. 1965년이 되자 42,000달러가 되었고, 현재는 62,000달러가 넘는다.

1950년대와 1960년대가 미국 중산층이 가장 넉넉한 보수를 받았던 시절이란 점은 대부분이 인정한다. 하지만 물가 상승률을 감안해 금액으로만 보면, 미국 중산층을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어느 시점보다 2018년에 더 많은 보수를 받았다. 시간당 임금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감정과 현실의 단절된 것을 보면 지난 60년 동안 그만큼 눈높이가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조금 더 일반화하자면, 1950년대 휴가 기간에 주로 캠핑을 즐겼다. 옷을 물려 입는 것도 당연했다. 28평짜리 집이면 충분했다. 아이들은 같은 방을 썼고, 그네가 좋은 놀이기구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가정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눈높이가 높아져 버렸다.

하지만 당시에는 모든 중산층 가정이 다 그랬기 때문에 불평불만이란 생각하기 어려웠다. 중요하게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이다.

존 D. 록펠러가 살던 시절에는 페니실린도, 선크림도, 애드빌 같은 진통제도 없었다. 하지만 머리가 아플 때 애드빌을 먹고, 햇빛이 강하면 선크림을 바를 수 있다고 해서 미국 저소득층이 록펠러보다 더 잘 산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과 비교해 자신의 삶을 판단한다. 모두가 그런다. 사람들의 눈높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변한다. 세바스찬 융거의 책 “(Tribe: On Homecoming and Belonging; 트라이브, 각자도생을 거부하라)”은 재난 상황에 처한 사람들, 예를 들어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과 자연재해를 겪은 이웃들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이유를 설명한다. 한 배에 탄 모든 사람이 힘을 모아야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낙관주의자라면 삶의 질은 계속 좋아질 거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삶의 질이 더 나아진다고 해서 그만큼 더 행복할 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삶의 질이 나아지만 그만큼 눈높이도 높아질 테니 말이다. 돈이 많아지만 그만큼 행복도 늘어나지면, 어느 시점부터는 돈이 많아지는 만큼 행복이 늘지 않게 된다.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연봉이 100억 인 헤지펀드 매니저는 자기 삶을 연봉이 100억 인 다른 헤지펀드 매니저들과 비교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만큼 자기 삶이 놀랍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들의 눈높이는 이미 달나라에 가 있기 때문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가 더 좋은 시절이었다고 느낀다면, 소득 계층 간의 불평등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초부유층이 부를 과시해 다른 모든 이들의 그런 삶을 부럽게 여기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자기 삶의 척도로 생각할수록, 삶에 대한 척도, 즉 눈높이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좋다, 나쁘다고 판단할 것은 아니고, 해법도 없다. 그저 그냥 그런 것이다. 죽음이나 세금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시장에서 거품은 생기기 마련이다.

거품이 터지고 나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곤 한다. 정부는 새로운 규정을 만들고, 개인들은 "이번 거품에서 교훈을 배웠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시 그런 짓을 저지르게 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시장이 존재하는 한 거품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투자 수익의 가장 중요한 변수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식을 얼마에 사야 잘 산 것인지, 빚을 얼마나 져야 많은 것인지, 금리가 얼마나 높아야 기업이 투자를 중단할 시점인지 우리는 모른다.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예측 가능한 답은 없다. 그리고 예측 가능한 답이 없을 때, 그 "한계점"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이상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순이익 대비 주가가 49배가 적당한지 알 수 없다면, 50배면 어떨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토할 때까지 먹어보는 것이다.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장도 토할 때가 있고, 종종 그런다. 그리고 그러한 한계점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한계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수익을 얻을 가능성이 있고, 그때까지 시장은 계속 고점 탈환을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안에 보물이 들어있을 수 있다.”라고 써 붙인 상자를 가져다 놓으면, 분명 누군가가 나서 상자를 열어보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두 번째는 동성과 관련이 있다. 주가가 언제 얼마큼 오를지 알 수 있다면, 투자 위험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미리 주식을 사서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다고 조용히 팔고 나오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험이 없다면 투자자들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을 때까지 주가를 끌어올릴 것이다. 인도 위에 오만 원짜리를 그냥 보고도 지나갈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주가가 오를 곳이 없어지면, 그동안 주식을 샀던 사람들이 나타나 한꺼번에 수익을 실현하려 할 것이고, 그러면 시장에 광풍이 불어 주가를 곤두박질치게 만들 것이다. 즉, 시장에 변동성이 없다면, 변동이 나타날 때까지 가격이 상승할 것이다. 따라서 시장에 변동성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앞으로 계속 그럴 것이다. 죽음이나 세금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3.투자 방법을 두고 싸우기 마련이다.

2009년 말 16세에서 19세까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의 실업률은 48.5%였다. 대학을 졸업한 45세 이상 백인 여성의 경우에는 3.7%였다.

이보다 더 극단적인 실업률 비교 수치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개인 간에 심각한 불균형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마다 투자 방법, 투자 목표 또는 위험 감수와 기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만 강조하면서 다른 사람의 투자 방법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너일 카너먼이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보다 직접 경험한 것이 훨씬 더 생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흔히 있긴 하지만, 자기 경험을 기준으로만 다른 사람이 다른 상황에서 한 경험을 판단하면서 자기주장만 옳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공감 능력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의 경험은 거의 동등하다는 물리학과 같지는 않다. 물론 물리학에서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투자에 관한 논쟁만큼 폭넓고 열띠지는 않다.

누구나 다른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자기 데이터를 봐주고, 자기 투자 방법에 동의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사람들이 저마다 아주 다른 투자 경험을 갖고 있는 한 투자 방법도 그만큼 다를 수밖에 없다. 죽음이나 세금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료 출처: Collaborative Fund, "Death, Taxes, and a Few Other Things"